
자운영 - 시라토리자와 10번에
대한 100일간의 고찰
* 하나하키au / 캐붕주의
“켄지로.”
“왜.”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또 뭐.”
“너 이름, 내 이름이랑 비슷해서 부를 때마다 기분 이상해.”
“……허.”
별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네. 지금도 켄지로 켄지로 거리면서 잘만 부르는 있는 주제에. 옆에 앉은 저를 팩 쏘아보며 작게 욕을 내뱉는 연갈색 머리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후타쿠치가 피식 웃었다. 항상 그랬듯 오늘도 연습을 마친 뒤 공부를 하다 잠시 나온 것이었는지 콧대에 안경이 눌려 생긴 자국이 보였다. 말랑해 보이는 피부에 서린 붉은 자국이 꽤나 안쓰러워 손으로 꾹꾹 눌러줘 볼까도 싶었지만 바로 생각을 접었다. 저 놈 성격에 이런 친절 따위 베풀어 봤자 좋은 소리를 들을 것 같지도 않고. 그리고 또, 지금은 무엇보다도….
“네 그 까칠한 성격이 언제쯤 온순해질까- 싶다, 나는.”
“…….”
“…에? 갑자기 표정이 왜 그래, 너.”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는 이 녀석의 상태가-
“……켄지로?”
매우, 좋지 않았다.
“…뭐야, 왜 그러는데.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라도….”
“……같아.”
“…뭐라고?”
“……전부 다, 좆같다고.”
툭, 눈물 한 방울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 뒤 동시에 켄지로의 작은 입에서 이젠 일상과도 같은 험악한 욕지기가 튀어 나왔다. 내 시선보다 조금은 낮은 곳에 위치한 가지런한 담갈색 눈동자 안으로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슬픔이 들어찼다. 방금 전에 내뱉은 살벌한 말과는 사뭇 다른 투명한 눈물이 차디찬 눈가에 방울방울 솟아오르는 모습을 두 눈으로 마주한 나는, 정말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가슴 한 쪽이 저릿하게 아파오는 것을 온 몸으로 느껴야만 했다.
/
켄지로의 우는 얼굴을 보게 된 것은 3개월 전 그 날 이후로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 때도 그러했듯, 이번에도 어김없이 우는 녀석의 얼굴을 보자마자 사고회로가 정지한 나는 눈물을 벅벅 닦아 내리는 서러운 그 얼굴을 멍청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
“…….”
꺼이꺼이 소리를 지르며 울분을 토해내는 격한 울음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잠잠히, 쉴 새 없이 흐르는 굵은 눈물방울들이 단정한 신발 언저리로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꽤나 마음 아픈 일이었다. 뭐라 달래줄 말을 찾을 새도 없이 저 혼자 깔끔히 눈물을 그친 켄지로는 발간 눈으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미안.”
“…에, 아냐. 뭐 이런 걸 가지고….”
“너한텐 매번 이렇게 다 무너진 모습만 보이는 것 같아서.”
“…….”
“…뭐, 이런 모습 보이려고 만나는 거긴 하지만.”
너도 참 고생이다. 그러니까 왜 하필 그때 날 마주쳐서. 바람 섞인 웃음을 내비치며 코를 훌쩍이는 켄지로의 목소리는 여전히 푹 젖어 있었다.
3개월 전 마주쳤던 그 때처럼, 여전히 네 목 안에서는 눈처럼 하얀 꽃들이 토해져 나올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궁금증이 일었다. 가까스로 눈물을 그친 켄지로는 그 이후 별다른 말이 없었고, 평소 같았다면 그 옆에 앉아 괜한 시비를 걸고 있었을 나 또한 오늘만큼은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니, 꺼낼 수 없었다.
/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3개월 전, 화장실에 들어온 내가 울며 꽃을 토하는 켄지로를 보게 된 것은 말 그대로 우연이었다. 때는 2월 중순, 늦겨울의 추위가 미야기를 포함한 일본 곳곳에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고, 시라토리자와와 연습 경기가 잡힌 탓에 아침부터 긴장을 했던 나는 급히 화장실을 찾았다.
꽤나 구석에 위치한 화장실을 겨우 찾아내 콧노래를 부르며 한껏 느긋하게 볼 일을 보고 있던 그 때, 닫혀있던 좌변기 화장실 문 안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커헉, 컥…….’
‘……?’
누가 들어도 헛구역질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적나라한 소리였다. 어떤 놈이 아침 댓바람부터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이러고 있는 거야. 밤새 술이라도 진탕 마신 게 아니고서야…. 그나저나 이 시간에 체육관에 있는 걸 보면 배구부원일 텐데. 소리의 근원지가 내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괜한 장난기를 비롯한 호기심이 일었다. 상대팀 학교 부원들은 아니겠지. 그 잘난 명문고생들이 여기서 이러고 있을 리가 없잖아. 아아, 설마- 카마사키상 어젯밤에 과음이라도 하고 오신 건가? 그런 거라면 얼추 일리가 있는데….
누군지는 몰라도 열자마자 잔뜩 놀려줘야겠다는 재미있는 생각에 입 꼬리를 실실 올린 채였다. 바지를 추켜올리고 망설임 없이 뒤를 돈 나는 닫힌 문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벌컥, 문을 열었다.
‘아니, 도대체 누ㄱ……어?’
‘……으윽, 흐…….’
칙칙한 갈색 문을 열고 난 뒤 내 시야 안에 들어찬 인물은, 카마사키상도, 모니와상도, 아오네도 아니었다.
‘……하아, 뭐야.’
‘…….’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그 때 내가 봤던 모습은, 정말… 누구든 한 번이라도 눈에 담고 나면 다시는 잊을 수 없을, 가히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무, 뭐야, 이게, 이게 다….’
‘……안, 꺼져?’
언제부터 이런 꼴을 하고 있었던 건지, 퉁퉁 부어 발개진 눈가에는 채 닦지 못한 눈물자국이 뚜렷이 보였다. 하얀 좌변기를 부여잡은 파리한 두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힘이 풀렸는지 반쯤 쓰러져있는 다리는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래서인지 제발 좀 꺼지라며 나를 쏘아봐는 사나운 눈빛을 보고서도 전혀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그래, 정말-
‘…저리, 컥, 허억, 가, 가라고 했다.’
‘……너.’
‘……귀 먹었어? 가, 큭, 가, 라고…….’
‘…….’
제발, 좀…가. 가줘, 그냥.
‘…….’
안아주고 싶었다. 피를 토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제 허연 목을 꽉 부여잡고, 새하얀 꽃잎들을 우수수 토해내며 눈물을 뚝뚝 흘려대는 안쓰러운 그 작은 몸을.
내게 이런 치부를 들킨 것이 분하다는 듯 입을 막은 채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꽃잎을 감추려 애를 썼지만, 화장실 칸 내부에 가득 흩뿌려진 새하얀 꽃잎들과 알 수 없는 꿀 향이 만연해 있는 이러한 상황에서 그런 몸짓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1학년 세터, 맞지.’
‘…….’
‘이름이 뭐였더라. 시…라부?’
‘……맞으면 어쩔 건데.’
‘…아니, 뭐.’
뭘 어쩔 생각까진 없고. 그냥 좀 낯이 익어서.
씩 웃는 내 얼굴을 아니꼽게 쳐다보면서도 팔랑거리며 나부끼는 꽃잎을 어찌할 줄 모르던 1년 전 켄지로의 얼굴이, 2학년이 된 지금 새삼스레 다시 떠올랐다.
그 날 켄지로는 곧 죽을 듯이 기침을 하며 꽃을 토해내던 모습이 무색할 만큼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워밍업을 하며 몸을 풀었다. 아직 1학년이다 보니 주전 선수로 풀 경기를 뛰진 않았지만 연습경기에서 1, 2학년들의 경험을 키워주려는 목적인 듯 간간히 교체되어 경기에 투입되곤 했다. 그 몹시도 평온한 모습에 영향을 받은 것은 억울하게도 나였다. 경기 시작 전부터 상대편 코트 쪽에 서 있는 동그란 갈색 머리통이 신경 쓰여 잘만 내리치던 스파이크가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했고, 종래에는 가장 자신 있는 블로킹마저 제대로 되지 않아 결국 벤치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야 말았다. 머리 좀 식히며 경기를 지켜보라는 코치님의 말씀대로 벤치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던 나는 또다시 조금 전 보았던 화장실에서의 상황을 떠올렸다.
분명 꽃이었다. 눈처럼 하얗고, 동그란 잎을 가진 예쁜 꽃.
백 명 중 한 명이 걸릴까 말까한 희귀병이라고 들었다. 이름부터 증상까지 워낙 특이해서 수업 시간에 한 번 듣고 난 뒤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었는데, 말로만 듣던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꽃은커녕 입에서 사포라도 나오지 않으면 다행일 것 같은, 저 까칠한 갈색머리 세터가 누군가를 좋아해서 내뱉는 꽃을 보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그래.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놀라 기함하고도 남을 일이었는데, 그보다 더 놀라 까무러칠 만한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지.
“아- 날씨 좋다.”
“오늘은 상태 괜찮네, 켄지로?”
“그럼 평소에는 안 괜찮았다는 소리냐?”
“아니, 너 저번에 나 만났을 때 울….”
“…배! 배 안 고프냐? 뭐 먹으러 안 가?”
급히 말을 끊으며 교문 밖을 나서는 이 작은 갈색 머리통의 일방적인 고민 상담을 주기적으로 들어주는 사이가 될 줄은.
“라멘 먹을래?”
“어차피 너 먹고 싶은 거 먹을 거잖아.”
“어, 그러니까 닥치고 따라와.”
체육복이나 경기복 차림의 모습이 더 익숙해서인지 보라색 교복바지를 입고 있는 녀석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제 봐도 어색했다. 바지주머니에 손을 끼워 넣고 휘적휘적 뒤를 따르니 고개를 홱 돌리며 나를 쏘아보는 눈빛에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빨리했다. 나름 고민을 들어줄 입장으로 찾아온 사람인데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한다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녀석이 라멘 값을 계산할 것이리라 굳게 믿고 얌전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라멘 둘이요.”
주문을 한 뒤 자리에 앉은 녀석은 평소와 다름없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문득 저 메마른 눈매가 환하게 말려 올라가는 모습은 어떨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시와카한테는 나름 싹싹하게 대하는 것 같던데. 선배들에겐 잘 웃어주려나. 아니면 역시, 지금 좋아한다던 그 사람에게….
“켄지.”
“어, 어?”
“고민이 있어.”
깔끔하게 정리된 손톱을 매만지며 켄지로가 말했다. 네 녀석 고민 들어준 게 어디 한두 번이냐. 이번엔 또 무슨 얘긴데. 속 편한 내 물음에 퉁명스런 표정을 짓던 녀석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꽃이….”
“응. 꽃이 왜.”
“…안 나와.”
“…꽃이 안 나온다고?”
“어.”
입 안에 손까지 집어넣어 봤는데, 아무리 헛구역질을 해봐도 안 나와. 갑자기 왜 이러지? 걱정스런 표정으로 연신 손톱을 만지작거리는 녀석의 모습에서 미세한 불안함이 묻어나왔다. 그 위태로운 모습이 나로서는 전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니, 기뻐해야 할 일 아냐? 굳이 입 안에 손까지 넣어가며 애쓸 필욘 없잖아. 그렇게 아파 죽을 것 같다던 꽃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건, 너도 이제 그 선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아냐.”
“…뭐?”
“……좋아해, 아직.”
“…….”
“……정말 좋아하는데, 왜, 왜 안 나오는 건지 모르겠어.”
이젠 짝사랑마저 그만두라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너무하잖아. 일 년 전에 흘리듯 고백한 것 빼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내가, 내가 이젠, 세미상을…….
“포기해.”
“……켄지, 나는…….”
“이젠 그만두라는 거야. 그 빌어먹을 짝사랑.”
“…….”
“너, 그 날 화장실에서 나 마주친 지 벌써 2개월 반이나 지났어. 나한테 들키기 몇 개월 전부터 그랬었다며. 그럼 적어도 반년은 훌쩍 넘었을 거 아냐. 혼자서 이게 뭐 하는 거야. 너만 아프고 너만 다치고. 이건 아냐. 그만할 때도 됐어.”
“…….”
매정한 내 대답에 종업원이 가져다준 라멘만 휘휘 저어대던 켄지로는 작게 욕을 내뱉었다. 욕을 들어먹어도 좋으니 이젠 정말 그만 뒀으면 싶었다. 저 작은 몸속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이젠 예쁘다는 생각마저 들지 않는 하얀 꽃잎이 토해지는 것을 수십 번 목격하고 나니 내 목구멍이 다 타들어갈 지경이었다. 저렇게 아파하면서, 꽃가루 알레르기네, 목감기네 하는 온갖 핑계를 다 대가면서 마스크를 쓴 채 기침을 멈추질 못하면서, 이젠 꽃이 나오지 않는다며 아쉬워할 지경에까지 이르다니. 그 선배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기에 매정하고 까칠하기로 소문난 욕쟁이가 이런 모습마저 보이는 걸까 싶었다.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은 식사의 끝이 보일 무렵, 먼저 젓가락을 내려놓은 녀석이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
“계절이 지나고 해마저 바뀌었는데, 아직까지 혼자서 이러고 있다니 웃긴 일이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담갈색 눈동자는 오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동그란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목 안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아서, 나는 들고 있던 젓가락과 함께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이번엔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
“너한테 말 안 한 게 있는데, 며칠 전에 세미상 다른 학교 여학생하고 같이 있는 거 봤어.”
“…….”
“그냥, 여태껏 공부하고 배구했던 것처럼 무식하게 좋아하면 언젠간 마음이 닿겠지 싶었는데, 내가 너무 바보 같았던 거지. 네 말이 맞았어.”
“…….”
“그만 좋아할래, 이제.”
“…….”
“…….”
“……그래.”
잘 생각했어, 켄지로. 올라가지 않는 입 꼬리를 억지로 올려 쥐어 짜내듯 웃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가 잘 말한 거겠지. 안 그래도 생각 많은 녀석에게 괜한 소릴 한 건 아니겠지. 왜 그런 진 모르겠지만 더 이상 그 선배를 좋아하지 않겠다는 녀석의 말을 듣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정말 이러면 안 되는 거지만, 입가가 조금 간질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계산은 내가 할게.”
“…네가 웬일로 먼저 그런 소릴 다 하네.”
“…뭐, 가끔은 이럴 때도 있어야지.”
곧 울 것 같은 녀석 지갑까지 털어 가며 라멘 얻어먹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거든. 속으로 채 삼키지 못한 말을 웅얼거리며 계산대로 향했다.
/
중학교부터 고등학교에 들어올 때까지 제대로 된 연애를 해 본 경험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고 했다. 고백을 받아 사귀어 본 적은 있지만 누군갈 먼저 좋아해본 적도 없고, 좋아한 적이 없으니 고백해본 경험 또한 당연히 없다고, 그래서 이렇게 좋아하는 상대를 생각하며 마음 졸인 적이 처음이라는 말도 했었다.
녀석은 그렇게 꼬박 일 년 간 호된 첫사랑을 앓았다. 동경하던 이를 좇아 기를 쓰고 노력해 입학한 이곳에서, 같은 배구부의, 게다가 같은 포지션의 한 학년 선배를 좋아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숨기고 감춰오던 마음을 어찌하지 못한 채 꽃을 토하며 몇 날 며칠을 아파할 줄도, 화장실에서 날 마주칠 줄도, 이런 끝을 보게 될 줄도, 전혀 몰랐겠지. 나도 몰랐다. 그저 강호교의 성질 나쁜 세터 정도로만 생각했던 녀석의 숨겨진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을 계기로 이렇게 나름 두터운 사이로 발전하게 될 줄은. 그리고,
“…켄지로?”
[어, 켄지.]
이렇게 전화기 너머 녀석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평소보다 들뜬 듯 뒤이어 이어지는 녀석의 음성을 나는 빼먹지 않고 귀에 담았다.
[오늘 잠깐 만날 수 있어?]
“오후 연습 끝나고 잠깐? 왜, 무슨 일인데?”
[아냐, 별 일은 아닌데-]
여전히 기분 좋아 보이는 음성이 말을 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 며칠이지? 달력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듣기 좋은 녀석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나 오늘 생일이거든.]
“…아, 생일 축하한다.”
[그리고, 더 이상 꽃이 안 나오는 이유도 알았어.]
“…뭔데, 그게?”
아, 생일이었구나. 건너가듯 곧 생일이 다가온다는 얘길 했던 걸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설마 오그라드는 생일 선물 같은 걸 바라고 전화를 한 건 아닐 테고. 느닷없이 며칠 간 잊고 있던 꽃 얘기를 꺼내는 녀석의 말에 이유라도 들어보자 싶어 툭 물음을 던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녀석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좋아한대.]
“…….”
[아니, 좋아하고 있었대.]
“……아.”
[혼자서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꽃이 나오질 않았던 거야.]
“…….”
[…켄지?]
“…어, 어. 듣고 있어. 계속 말해.”
[내가 봤다던 다른 학교 여학생은 세미상 여동생이었대.]
내 생일 선물을 같이 고르러 갔었나봐. 부 활동 시작 전에 갑자기 날 불러내서는 큼지막한 선물 상자를 주면서,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 있지. 정말, 살면서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전개라, 그걸 받고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그랬구나.”
[응. 천성이 다정한 사람이라 나한테만 유독 더 특별하게 대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는데, 세미상은 그랬다고 하더라고.]
“…….”
[켄지, 많이 바빠? 주변도 소란스럽고. 내가 방해한 건가?]
“…어, 아냐. 안 바빠. 그런데 지금 잠깐, 갑자기 코치님이 부르셔서, 끊어봐야 될 것 같은데.”
[아- 그래, 알겠어. 목소리가 평소보다 이상한데, 5월에 감기 걸리는 멍청한 짓 벌이지 말고 몸 관리 잘 해.]
“…그래, 끊는, 다.”
뚝. 전화가 끊어지기 무섭게 화장실로 달려간 나는 쇠문을 걸어 잠그고 타들어갈 것 같이 뜨겁게 죄어드는 목을 움켜쥐었다. 쿨럭이는 기침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며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
아, 꽃을 토할 때마다 죽을 것 같다던 켄지로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나 보다.
“……내가,”
내 목 안에서, 이딴 게 나오는 걸 보게 될 줄이야.
“……젠장할.”
욕지기를 내뱉자마자 또 다시 터져 나온 기침과 함께, 내 입 안에서는 빌어먹게 예쁜 꽃잎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이후 켄지로가 말해준 바에 의하면 그간 녀석의 입에서 나온 꽃의 이름은 흰동백이라고 했다. 꽤나 생소했던 그 이름에 반해 내 것은 굳이 찾아볼 필요도 없는, 짜증날 정도로 새빨간 핏빛 장미였다.
…진짜 피가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할 정신머리는 남아 있었나 본지 이런 상황에서도 바보처럼 웃음이 나왔다. 언제부터인진 잘 모르겠지만, 네가 그 선배를 좋아했듯 나도 너를 그런 마음으로 담아두고 있었구나. 별 생각 없이 시작했던, 반은 호기심, 반은 장난이었던 고민 상담의 끝이 고작 이런 것일 줄 알았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너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날 널 마주치는 게 아니었다. 널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너를, 시라부 켄지로를, 장미처럼 뾰족하고 또 그만큼 예뻐서 짜증나는 너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시라토리자와 10번에 대한 100일간의 고찰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