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
개인 화실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는 시라부. 거의 다 정리 된 것 같은 화실을 둘러보다 짐 박스 옆에 있는 이젤에 앉아 연필을 잡음.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후타쿠치.
-뭐야, 벌써 짐 다 쌌네?
-아직 정리할 거 더 남았어.
시라부는 후타쿠치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리던 그림을 계속 그린다. 후타쿠치는 화실에 있는 소파에 앉아 시라부를 쳐다봄. 시라부는 누군가의 손을 그리고 있음.
몇 시간이 흐른 뒤, 졸다가 잠에서 깬 후타쿠치. 눈을 떴는데 화실이 엉망임. 아까 그리던 그림은 잔뜩 구겨진 채 바닥을 뒹굴고 있고 시라부가 앉아있던 의자는 다리 하나가 부러짐. 후타쿠치는 놀라서 시라부를 찾으려다 제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는 시라부를 발견하고는 다시 소파에 기대앉음. 후타쿠치는 ‘아, 켄지로 또 성질 못 참았구나.’ 하며 잠든 시라부 얼굴만 가만히 쳐다봄. 얼마 지나지 않아 인상을 쓰며 깨어나려고 하는 시라부. 후타쿠치는 시라부를 아예 흔들어 깨운다.
-켄지로, 다 잤으면 이제 저녁 먹으러 가자. 나 배고파서 죽을 것 같아.
-... 알겠어.
시라부는 비몽사몽하고 후타쿠치는 그런 시라부의 손을 잡고 화실을 나감.
봄과 여름사이
시라부는 어릴 때부터 한 기업인의 후원을 받아 그림을 그려왔음. 원래 살던 곳은 시골이었는데, 초등학교에 입학하서 더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 후원해주는 분의 집에서 살게 되었음. 그렇게 도시로 올라온 시라부.
처음 후원자의 집에 온 초등학생 시라부는 집 크기에 놀란다. 자기가 쓰는 방은 2층 맨 구석에 있는 방인데, 원래 쓰던 방의 3배는 되는 것 같다며 속으로 좋아함. 그리고 각종 미술용품이 가득한 것을 보고 기분 좋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
한참 즐겁게 그리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계속 퉁퉁 소리가 들려옴. 처음에는 남의 집이기도 하고, 그냥 신경 끄자. 했는데 너무 오래 반복해서 나는 소리에 나중에는 잠도 못잘 것 같다고 생각함. 어디에서 바람이 들어오나? 하며 소리의 근원을 찾아나서는 시라부.
시라부는 소리를 따라가다 결국 자기 방에서 제일 멀리 있는 복도 끝의 방까지 오게 됨. 제 방보다 훨씬 큰 방문에 온몸을 바짝 기대서 소리를 들음. 호기롭게 소리의 원인을 찾아냈지만 처음 온 집이라 문을 열 용기는 없었음. 거슬리지만 그냥 가야지.. 하며 문에서 떨어지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고 앞으로 넘어지는 시라부. 문을 연 사람은 당황해서 넘어지는 시라부를 피하고, 덕분에 시라부는 완전히 바닥에 엎어짐. 황당한 표정으로 올려다본 자리에는 제 또래의 초등학생이 놀란 얼굴로 서있었다.
시라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애가 이 집, 그러니까 시라부의 후원자인 카와니시 씨의 아들 카와니시 타이치라는 것을 알게 됨. 그리고 그 때 퉁퉁거리던 소리는 카와니시가 배구공을 튕기는 소리였음. 카와니시도 그 때 방문 앞에 서있던 애가 아버지가 계속 후원해 오던 아이라는 걸 알게 된다. 두 사람은 개인주의적인 성향도 비슷하고 동갑에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붙어있는 시간이 많아서 금방 친해졌음. 거의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가 됨.
그렇게 초등시절이 지나고 어느 새 중학생이 된 두 사람.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 시점이었음. 꽃가루 알레르기가 심한 카와니시는 마스크를 쓰고 훌쩍거리며 등교하고 시라부는 그 옆에서 같은 교복을 입고 있음.
-조만간 한 번 나가서 꽃 그림 그리고 싶어.
-그럼 우리 꽃구경 갈래?
-지금도 죽으려고 하면서 무슨 꽃구경이야.
빨개진 눈으로 꽃구경을 가자고 하는 카와니시를 단칼에 거절한 시라부. 단호한 시라부의 태도에도 카와니시는 아 왜~ 하며 시라부에게 엉겨 붙음. 하지만 시라부는 카와니시를 뿌리치고 자기 교실로 들어감.
시라부는 멍하게 창밖을 보고 있고 후타쿠치는 옆에 있는 의자를 소리 나게 끌어 자리에 앉았음. 의자를 끄는 소리에 신경이 거슬린 시라부는 살짝 인상을 찌푸림.
-헐, 미안. 소리 때문에? 미안.
-... 아니, 미안할 건 없고.
시라부는 저가 인상을 쓰자마자 미안하다며 당황하는 후타쿠치의 반응이 오히려 당황스러웠음. 하여튼, 남들한테는 매번 인상 구기면서 놀려먹는 애가 폐 끼치는 건 싫어해요. 하며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림.
밖에는 벚꽃이 잔뜩 피었음. 아, 예쁘다. 시라부는 아침에 카와니시가 꽃 구경 가자고 했던 게 떠오름. 왠지 간지러운 기분. 꽃구경.. 가면 타이치 힘들겠지? 하면서도 가고 싶은 기분. 꽃 그림이랑 타이치도 같이 그리면 더 좋을 것 같은데. 하며 책상에 엎드리는 시라부.
시간이 좀 흐르고, 4월 말. 시라부는 늦은 밤에도 항상 공부를 했음. 후원받으면서 지내는 입장인데 공부를 게을리 하는 건 좀 아니라는 스스로의 판단이었음. 아무튼 그날도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있는데, 카와니시가 방문을 열면서 들어옴.
-켄지로. 나 하나도 모르겠어.
카와니시는 시라부 옆에 의자를 끌고 와서 앉음. 카와니시가 가지고 오는 문제들은 사실 거의 다 카와니시가 풀만한 수준의 문제였음. 시라부는 얘 또 공부하기 싫어서 놀러왔네. 정도로 취급하고 가르쳐주지도 않음. 그래도 카와니시는 시라부가 약한 문과과목을 잘하고 시라부는 카와니시가 못하는 수학이나 과학을 잘해서 둘은 같이 공부하는 게 좋았음.
어느새 새벽 3시가 넘음. 카와니시는 공부를 하다가 왠지 시라부가 조용하다 싶어서 쳐다보니 시라부는 엎드려 자고 있음. 카와니시는 문득, 자고 있는 시라부의 속눈썹이 참 길다고 생각함. 사실 예전에 볼이 말랑해 보여서 꼬집은 적은 있었는데, 힘 조절에 실패해서 시라부를 깨웠고 한 대 맞은 전적도 있었음. 이번엔 절대 안 들킨다. 하며 살며시 제 손가락을 시라부의 속눈썹에 얹는 카와니시. 와, 만져지네. 카와니시는 시라부의 속눈썹을 만지다 갑자기 멈춤.
켄지로, 속눈썹도 길고 피부도 엄청 희네. 카와니시는 저도 만만치 않게 하얗다는 걸 모르는지 한참동안 시라부를 쳐다본다. 갑자기 인상 쓰면서 깨는 시라부. 카와니시는 화들짝 놀라며 연필을 잡는다.
-깼어?
-응.. 아, 나 안 돼. 잘래.
시라부는 잠이 덜 깬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몸을 던짐. 카와니시는 다시 공부를 하려다 멈추고 시라부 쪽으로 몸을 돌림.
-켄지로.
-...
-켄지로.
-응?
-나 여기서 자도 돼?
시라부는 잠결에 알겠다고 대답하고 카와니시는 조심스럽게 시라부 옆에 누움. 곤히 잠든 시라부. 카와니시는 자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심장이 너무 빨리 뛴다. 왜 이렇지? 왜 긴장되는 거지. 켄지로 자는 거, 아까 한참 봤는데. 왜? 카와니시는 자신을 이해 못하겠다는 듯 계속 스스로 질문을 함.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는 시라부의 얼굴에 집중함. 그리고 새벽이 찾아올 때 쯤, 카와니시도 잠이 든다.
며칠 뒤, 넓은 식탁 끝에 마주보고 앉아서 밥을 먹는 카와니시와 시라부. 카와시니는 식탁에 놓인 작은 달력을 봄.
-곧 너 생일이네.
-어. 맞아.
카와니시는 잠시 생각하고 말을 이어갔음.
-그날 그럼, 오랜만에 같이 배구 보러 갈래? 보고나서 저녁 먹고. 아, 배구 말고 전시회도 괜찮아.
카와니시는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으면서 말함. 배구? 전시회? 둘 중에 고민하는 카와니시. 하지만 그 고민이 무색하게 시라부는 아. 하며
-나 그날 반 친구들이랑 놀기로 했어.
라고 함. 카와니시는 먹던 수저를 내려놓음. 몇 초 간 정적이 흐름. 카와니시는 당황했는데 시라부는 아무렇지 않아 보임. 카와니시는 덤덤한 시라부를 보며, 아.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우리 둘 다 중학교 올라와서 새 친구 사귀었으니까. 라고 생각함. 그런데 왜. 왜 또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카와니시는 시라부 옆에서 잠에 들지 못한 그 날이 생각남.
시간이 흘러 시라부의 생일이 됨. 카와니시는 제 방에서 연필을 잡고 공부를 하기 위해 책을 들여다보고 있지만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음. 카와니시는 연필을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아 배구공을 튕기기 시작함.
켄지로 지금 뭐하고 놀까? ... 그래도 좀 섭섭하다. 여태까지 맨날 나랑 놀았는데. 반 친구들이라면 후타쿠치 걔도 있는 건가. 싫다. 왜?
카와니시는 싫다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배구공을 잘못 친다. 배구공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고, 카와니시 침대 옆의 유리병을 깸.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사방에 튀고, 카와니시의 손에는 피가 비침. 점점 피가 나오는 제 손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긴 카와니시는 곧 핸드폰을 들어 시라부에게 문자를 보냄.
얼마 지나지 않아 시라부는 급하게 카와니시의 방문을 열고 들어옴.
-괜찮아? 어디 봐.
시라부는 다급하게 카와니시의 손을 잡아 폈지만 이미 카와니시는 치료는 물론 깊은 상처가 아닌데도 그 위에 붕대까지 감아 놓은 상태였음.
-뭐야, 치료 다했네?
-왜 왔어?
시라부는 황당함도 잠시, 너무나도 건조하게 왜 왔냐고 물어보는 카와니시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카와니시를 쳐다보기만 함.
-어?
-왜 왔냐고.
시라부는 카와니시가 왜 왔냐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음. 사실 안 와도 되는데. 시라부도 알고 있었음. 이 집에는 굳이 내가 아니어도 타이치를 치료해 줄 사람은 많고,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충분히 혼자서 치료 할 애였는데. 시라부는 혼란스러워져 카와니시를 멍하니 쳐다만 봄. 카와니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붕대를 감은 손으로 시라부의 얼굴을 쥠.
-계속 헷갈렸는데.
-...
-이제 확실해졌어.
뭐가? 시라부는 뭐가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뱉지 못함. 카와니시는 그대로 시라부를 안으며 와줘서 고맙다고 하고. 시라부는 이게 무슨 상황이고, 감정인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알 수 있는 게 없었음.
-생일 축하해.
다음 날, 시라부는 하루 종일 카와니시랑 둘만 있는 게 어색했음. 일부러 피해보기도하고 하교할 때 후타쿠치를 중간에 세우기도 했음.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시라부는 자연스럽게 다시 카와니시를 예전처럼 대할 수 있게 됨.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남은 의문은 풀리지 않음.
시라부는 오랜만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함. 스케치를 반 쯤 완성하는 동안 시라부는 카와니시가 했던 말들이 생각나서 몇 번이나 손을 멈췄음. 답답해서 미치겠다, 하며 시라부는 습관처럼 창문 밖을 쳐다봄.
창밖에는 카와니시가 얇은 긴팔을 입고 마당에서 강아지를 구경하고 있음. 무서워서 만지지도 못하면서 보는 건 또 좋아한다. 시라부는 창문에 비친, 미소를 짓고 있는 제 얼굴을 발견했음. 시라부는 조금 덥다고 느꼈다.
아, 여름인가보다.
그렇게 서로에 대한 마음을 자각한 채로 2년이 흐름. 두 사람은 이제 3학년이 됨. 시라부는 어쩐지, 날이 가면 갈수록 카와니시의 얼굴을 보기가 힘듦. 시라부도 입시에 집중하느라 바빴고. 그날도 혼자서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음. 마침 카와니시 아버지의 비서가 시라부 앞에 서서 커피를 타기 시작함.
-저, 요즘 타이치가 집에 잘 없네요.
-유학 준비로 바쁘십니다.
유학? 시라부는 밥을 먹던 손을 멈추고 비서를 쳐다봄. 비서는 몰랐냐는 표정으로 시라부를 쳐다봄.
-네? 어디로요?
-글쎄요, 아직 준비 단계라. 아마 5월 초 쯤 가실 겁니다.
충격 받은 시라부. 시라부는 그날 밤, 오랜만에 카와니시의 방을 찾아간다. 시라부가 방문을 두드리자, 오랜만에 보는 카와니시가 문을 연다. 시라부도 카와니시도, 간만에 보는 서로가 무척 반가웠지만 상대는 아닌 것 같다며 둘 다 티를 안냄.
-너 유학 간다며?
시라부는 담담하게 말함.
-응.
카와니시는 시라부가 집안 사람 누군가에게 들었으려니, 하고 짐작하고 말했다.
-어디로 가는데?
-아마 미국?
-...언제 돌아와.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카와니시는 일부러 빠르게 대답함. 시라부는 정말 애가 나한테 말할 생각도 없었고 아무렇지도 않나보다. 함. 그래, 생각해보면 말 안할 수도 있지.
-그래, 알았어.
시라부는 또 담담하게 대답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감.
그 이후로 시라부는 카와니시를 잘 만나지 않음. 카와니시도 마찬가지. 일부러 피하기도 했고, 서로 시간대가 잘 맞지 않는 것도 있었음. 5월 3일. 시라부 생일 전날이었음. 시라부는 다음 날 후타쿠치랑 같이 전시회에 가기로 했음.
12시가 지나고, 자고 있는 시라부방에 찾아온 카와니시.
-켄지로, 켄지로.
자고 있는 시라부 옆에 누워 시라부를 깨우는 카와니시. 시라부는 부스스 눈을 뜨고 눈 앞에 있는 카와니시를 보며 꿈인가? 생각함. 하지만 곧 꿈이 아님을 안 시라부.
-나 내일 가.
시라부는 정신이 들었지만 눈은 반쯤 감겨서 떠지지 않는다. 카와니시는 시라부가 놀리 지 않게 계속해서 속삭이듯이 말했음.
-그동안 네가 날 너무 피해서 말 못했어. 아침에 눈뜨면 없을 거야.
-..안 가면 안 돼? 나는...
시라부는 말을 잇지 못함. 카와니시는 또렷한데 정신은 계속해서 흐려왔음. 분명 꿈은 아닌데 꼭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꼭, 꿈에서처럼 속삭이네.
-켄지로. 나 할 말 있어.
-뭔데?
시라부는 조용히 말하는 카와니시의 목소리에 다시 잠들 것 같았음. 이렇게 피곤하지 않았는데. 왜 잠이 안 깨는 걸까. 아니면 정말 꿈인가?
-나 너 좋아해.
-....
꿈은 아니다. 시라부는 점점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음. 하지만 카와니시가 또 속삭이듯 조용히 말하면 눈이 감겨옴
-1학년 때 네 생일 날 깨달았어. 딱 1년 전에.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몰라, 어쨌든... 나는 그래. 말하고 가고 싶었어.
카와니시는 쑥스러운 듯 횡설수설함. 점점 아무 말이나 하는 카와니시를 보며 시라부는 피식 웃고, 카와니시도 그 때야 저도 웃으며 손으로 시라부의 앞머리를 쓸어 넘김.
시라부에게 키스하는 카와니시. 양손으로 시라부의 뺨을 쥐고 몸을 바짝 붙임. 시라부는 내일 생각하면 부끄러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카와니시의 행동을 받아들임.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카와니시는 시라부에게서 떨어지고 말한다.
-지금 이러는 거 너한테 미안한 일이야.
-...응.
-나 갔다 오면 그 때 다시 너한테 정식으로 고백할 게.
시라부는 덜컥 눈물부터 나기 시작함. 그러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카와니시는 시라부를 제 품에 안고 잠듦. 그날 밤, 시라부의 기억은 딱 거기까지.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시라부 옆에는 아무도 없었음. 벌떡 일어나 자리를 더듬어 보지만 이미 온기조차도 식어 차가웠음. 시라부는 다시 드러누워 한참을 멍하니 누워있다.
2. 날 이름으로 불러주는 두 번째 사람
고등학생이 된 시라부. 시라부는 예고에 갔고 후타쿠치도 같이 감. 과는 달랐음. 후타쿠치는 사진과 시라부는 미술과. 시라부는 카와니시가 떠난 이후로 공부나 그림 같은 거에 더 몰두했음.
후타쿠치랑 시라부는 과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았음. 일부러 둘 다 서로를 자주 찾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후타쿠치와 시라부는 서로의 친구들과도 친해짐. 하지만 후타쿠치 친구들이랑 시라부 친구들은 조금 성향이 달랐음. 후타쿠치는 중학교 때랑 마찬가지로 조금 불량한 친구들이랑 어울렸고 시라부는 자기랑 비슷한 친구들. 학교에서 생활할 때는 제 친구들과 지내고 방과 후에는 주로 후타쿠치랑 노는 시라부는 그의 친구들과도 자주 어울림.
평소처럼 하교하던 날. 후타쿠치는 매번 시라부를 학원 앞까지 데려다 줌. 됐다며 거절하는 시라부에게 후타쿠치는 알바 가기 전까지 시간이 애매해서 그런다 함. 하지만 시라부를 데려다 주고 후타쿠치는 항상 미친 듯이 뛰어서 아르바이트 하는 옷가게까지 갔음.
후타쿠치가 시라부를 좋아한다고 느낀 건 중학교 입학 날 때. 입학식에서 우연히 제 옆에 앉은 시라부가 너무 귀엽게 생겨서 조금 호감이 생겼는데, 짝이 되고 알면 알수록 생각보다 까칠하고 차갑다는 걸 알게 됨. 아, 얼굴만 그냥 귀여운 거였네. 하며 마음을 접으려던 찰나, 후타쿠치는 축구를 하다가 스탠드에 앉아있는 시라부를 봄. 그 때 시라부는 철봉 밑에서 놀고 있는 아기를 쳐다보며 연습장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음. 후타쿠치는 그 때 시라부 표정이, 진짜 시라부의 표정 같다 느끼고, 시라부에게 다시 빠짐.
아주 사소한 순간이었지만, 후타쿠치는 그 순간에 시라부가 어떤 사람인지 느껴졌고 알아가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 감정이 확신에 차는 것을 느꼈다.
아무튼 아르바이트하는 옷가게에 간 후타쿠치. 같이 일하는 사장 형에게 괜찮은 옷 나온 거 없냐고 물어봄.
-왜? 또 그 좋아한다는 애 주려고?
-네. 곧 걔 생일이거든요.
형은 후타쿠치한테 옷 몇 개를 보여줌. 후타쿠치는 그 중에 마음에 드는 맨투맨을 고름. 켄지로, 주로 니트만 입으니까 맨투맨도 하나 필요하지 않을까? 조금 보고 싶기도 하고. 라고 생각하는 후타쿠치.
-진짜 기분 좋아 보인다.
-엣, 그래요?
후타쿠치는 형의 말을 듣고 보니 자기가 엄청 웃고 있는 걸 봄. 어쩐지 민망해져서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거리는 후타쿠치.
-다른 때는 맨날 험악한 얼굴만 하고 있으면서. 손님한테도 그런 표정으로 좀 해라,
-그건 싫어요.
후타쿠치는 웃으면서 옷을 챙김. 오늘은 왠지 손님한테도 친절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음. 그러고 보니, 켄지로 생일마다 뭐했지? ... 카와니시 걔랑 매번 보냈지 아마? 후타쿠치는 옷을 포장하며 생각했음. 아까까지는 되게 기분 좋았는데. 순식간에 굳어진 후타쿠치의 표정.
그날 저녁, 후타쿠치는 시라부에게 전화를 걸었음.
-여보세요? 켄지로?
-어, 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시라부 목소리에 왠지 긴장이 되는 후타쿠치. 침을 한 번 삼키고, 숨을 가다듬는다.
-너 생일날 뭐해?
-몰라
아직 계획이 없다는 시라부의 말에 기쁜 후타쿠치. 후타쿠치는 둘이서 놀자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왠지 둘이서 놀자고 하는 게 민망하고, 시라부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자기 친구들이랑 다 같이 생일파티를 하자고 함. 물론 저녁을 먹은 뒤에는 따로 빠져나갈 생각이었지만.
-그래, 그러든가.
사실 후타쿠치는 거절당할 각오 정도는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괜찮다는 답변이 들려옴. 안심하며 전화를 끊은 후타쿠치.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퍽퍽 발로 차며 웃는다.
시라부의 생일. 후타쿠치는 알바 때문에 두 시간 정도 늦음. 마치자마자 달려서 도착한 곳은 학교 근처 공원이었음. 공원에 도착한 후타쿠치는 시라부를 찾는데 보이지 않음.
-야, 켄지로는? 왜 없어?
-갔어.
오늘 켄지로 생일파티하러 모인 건데. 왜 없지? 후타쿠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서 있다가 공원 바닥에 놓인 술병들을 발견함. 그제야 아차 싶은 후타쿠치. 켄지로 이런 거 엄청 싫어하는데. 후타쿠치는 놀고 있는 친구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시라부에게 전화를 걸며 집 쪽으로 뛰어감.
-켄지로 어디야.
-집 앞.
-거기서 기다려.
후타쿠치는 죽을힘을 다해서 뛰어감. 다행이도 시라부는 집 앞에 앉아서 후타쿠치를 기다리고 있었음. 역시나 어두운 시라부의 표정.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가만히 있는데, 시라부가 먼저 말을 걸어옴.
-켄지.
-응..
-너도 걔네처럼 그러고 놀아?
시라부의 말에 후타쿠치는 말문이 막힘. 그렇게 노는 것도 맞고, 시라부가 그런 애들 싫어하는 것도 아는데 별 생각 없이 같이 놀자고 한 것도 맞았기 때문에.
-네가 그렇게 다니든 말든 상관없긴 한데, 난 그런 거 싫어.
생각보다 담담하게 나오는 시라부에 오히려 당황하는 건 후타쿠치였음. 그보다 자기가 어떻게 다녀도 상관없다는 말이 더 상처인 후타쿠치. 대답이 없자 시라부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들어가려고 함.
-잠시만.
후타쿠치는 저도 모르게 시라부의 팔을 잡음.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데 시라부는 계속 뭐냐는 듯이 쳐다만 보고 있음. 아, 진짜.
-나, 그러고 다니는 거 맞아. 네가 그런 거 싫어하는 것도 아는데..
후타쿠치는 남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우물쭈물 말을 이어나감.
-니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달라져서...
이게 지금 상황이랑 무슨 상관인지 전혀 모르겠는 후타쿠치. 자기가 말하고 싶었던 건, 다른 사람들이랑은 아까 걔네들처럼 다니지만 널 위해서라면 안 그럴 수 있다는 거였는데. 계속 엉뚱한 말만 나옴.
-뭔 소리야?
-나 너 좋아하나봐.
3. 사랑은 늘 그랬다. 완전히 다른 말이면서도 늘 같은 동행.
-다음 주에 타이치 돌아온대.
대학생이 된 시라부와 후타쿠치가 카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음. 시라부는 어제 밤, 집 관리인에게 카와니시가 돌아온다는 말을 들었음. 그 말을 하는 시라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표정은 무척 상기되어 보였음.
후타쿠치의 고백 이후로 두 사람은 잠시 어색하긴 했는데, 결국 이루어지지는 않음. 시라부는 몇 년이 지나고 나서 자기도 후타쿠치를 조금 좋아했다고는 생각하게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아니었음. 그리고 무엇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시라부에게는 카와니시의 존재가 너무 컸음.
그런데 카와니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으니 매일 매일이 기다려졌음. 곧 온다는 데도 소식하나 없는 카와니시가 애석하기도 했지만 바빠서 그러려니, 시라부는 괜찮았음.
-그래? 잘 됐네.
후타쿠치는 아무렇지 않게 시라부의 말에 대답함. 하지만 후타쿠치는 기분이 조금 언짢아짐. 아무리 차였고, 시라부가 카와니시 좋아하는 거 알고 있다고는 해도 어쨌든 아직도 후타쿠치는 시라부를 좋아하기 때문임. 이렇게라도 옆에 있고 싶은 게 먼저였는데, 카와니시가 돌아오면 이마저도 힘들게 분명하고.
그렇게 일주일이 흐르고, 카와니시는 귀국함. 시라부는 귀국 날에 맞춰서 스케줄을 비우고 집에만 있었음. 하지만 저녁이 되어도 카와니시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시라부는 지쳐서 잠들었음. 깜짝 놀라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12시가 넘었고, 시라부는 카와니시에게 전화를 걸었음.
-타이치. 너 귀국 안했어?
-아, 했지. 미안. 정신이 없어서.
자다 깬 카와니시의 목소리에 시라부는 잠시 미안했지만 갑자기 서운함이 몰려옴. 아무리 피곤하고 바쁘다지만, 전화 한 통 해주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가서도 계속 뜸하게 연락하더니.
-알았어. 일어나면 전화해.
-응. 진짜 미안. 오랜만에 봐야하는데.
그렇게 며칠이 흘러도 시라부는 카와니시를 만날 수 없었음. 하루 종일 거의 연락도 없고 집에도 들어오지 않음. 시라부는 이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음. 돌아와서 다시 제대로 말한다며. 설마 유학하는 동안 마음이 식은 걸까. 생각해보면 식어도 이상하지 않았음. 5년 정도는 아예 만나지도 못했으니까.
계속 안 좋은 생각이 떠오르고, 시라부는 초췌해져감. 옆에서 지켜보는 후타쿠치는 애가 타고. 하지만 해줄 수 있는 건 딱히 없었음. 결국 시라부는 자신의 마음부터 차차 정리해가기로 했음.
그래서 맨 먼저 시작한 게, 카와니시 아버지와의 후원관계를 끊는 거였음. 계속해서 미술은 할 거지만 이대로라면 영영 카와니시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지 못할 거 같다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음.
그렇게 카와니시네 집에서 해 준 화실도 정리하는 시라부.
시라부는 후타쿠치의 도움을 받아 학교 앞 대학가 원룸 촌에 방을 하나 구함. 그 집에서 나오니까 좀 살 것 같다. 눈에서 안보이니까 이정도로 마음이 멀어질 수도 있네. 카와니시가 변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시라부.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기가 연애를 못하는 게 전부 카와니시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아서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음. 한 번에 정리해 버리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었고 깊었던 탓.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모르는 척 살았음. 카와니시의 존재 같은 건 처음부터 몰랐던 척. 좋아한 적도 차인적도 없던 것처럼. 그렇게 살면 조금 덜 힘들었지만, 마음이 가벼워지는 건 아니었음. 그걸 알고 옆에서 계속 챙겨주는 후타쿠치에게도 미안했음.
-켄지로, 벚꽃 구경 갈래?
오늘도 시라부의 자취방에 드러누운 후타쿠치의 말이었다. 시라부는 순간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힘들어하던 카와니시가 생각나서 흠칫했지만 알겠다고 함. 그리고 드는 생각이 곧 타이치 생일이네. 시라부는 아예 그 날 카와니시가 생각도 나지 않게 벚꽃 축제에 가서 즐기겠다고 생각함.
-4월 15일 어때?
후타쿠치는 좋다고 함. 4월 15일, 시라부는 원했던 대로 축제를 즐기는 내내 카와니시를 조금도 떠올리지 않았음.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예쁜 꽃도 많이 봐서 기분이 좋은 시라부. 해가 저물고 밤 축제까지 즐긴 후에야 집으로 돌아감.
후타쿠치는 자신의 집으로 가고, 시라부는 혼자 집으로 향함. 후타쿠치가 가고 혼자 남자마자, 하루 종일 묻어 두었던 카와니시에 대한 생각이 몰려왔음. 중학생 때 갔던 축제는 재미없었는데, 참 오래도 기억에 선명하다. 원래라면 금방 잊었을 생각인데, 이렇게 오래 남아있는 것은 분명 카와니시 때문이리라.
시라부는 집에 다와갈 때 쯤, 누군가 자신의 집 앞에 서있는 걸 발견함. 분명히 처음보는, 아주 낯선 실루엣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심장이 뛰었음. 시라부는 중학생 이후로 카와니시를 한 번도 본 적 없었는데도 그 사람이 카와니시라는 확신이 들었음.
점점 가까워져 오는 시라부. 자신을 발견한 그 실루엣도 멈춰 선다. 시라부도 그 자리에 멈추고 자세히 들여다봄.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확실했다. 카와니시 타이치다.
-켄지로.
키가 너무 크고 체격이 좋아졌지만 그 나른한 말투와 목소리는 여전했음. 시라부는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았음.
-미안. 내가 너무 늦었지? 너무 바빠서...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으면서 말하는 것도. 똑같았음. 시라부는 더 이상 카와니시를 쳐다보기가 힘들어서 고개를 푹 숙임.
-나 오늘 생일이잖아. 네 생일에 가서 내 생일에 다시 만나네.
-장난 쳐?
일부러 분위기를 밝게 해보려 엉뚱한 말을 하는 카와니시. 시라부는 그 의도를 알았지만 받아주고 싶지 않았음.
-미안해.
카와니시는 시라부에게 한 발 더 다가가서 손을 잡았음. 그리고 자켓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웬 종이쪽지를 내밀었음. 쪽지에는 삐뚤게 열심히 쓴 아이의 글씨가 적혀있었음. 시라부는 쪽지를 보고 피식 웃음.
[소원 들어주기 쿠폰]
그 쿠폰은 아주 어릴 때, 시라부가 카와니시 생일에 준 선물이었음. 소원 들어주기 쿠폰 3장.
-이걸 아직도 들고 있냐..
시라부는 울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음.
-응. 아직 유효기간 남았어. 발행일로부터 10년.
카와니시는 쿠폰 구석에 적힌 문구를 읽어 줌. 시라부는 뭐야, 딱 10년이잖아. 오늘이 마지막이네. 라며 피식거렸음.
-아직도 들고 있냐더니, 언제 준 지도 기억하는 거 봐.
시라부는 헛기침을 하고 카와니시는 웃었음. 시라부는 자기가 바보 같이 느껴짐. 혼자 울고 집나오고 힘들어하고 원망했는데, 이렇게 보자마자 다 풀려버리다니.
-나 지금 이 쿠폰 쓸 거야.
-소원 뭔데.
-나랑 내 생일 보내기.
-됐네, 다음.
-너무해 켄지로..
카와니시는 너무하다며 슬쩍 시라부를 안았음. 시라부는 아무 저항 없이 카와니시에게 안김.
-두 번째는 안아주기.
시라부는 카와니시에게 푹 안겼음. 한참 차이나는 키 차이에 새삼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묘하게 안정적이라 기분은 좋았다.
-마지막은 뭐야
카와니시는 시라부를 제 품에서 떼놓고 눈높이를 맞췄음. 시라부도 카와니시도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음. 자세히 보니까 카와니시 눈이 빨갰음. 코도 훌쩍이고. 시라부는 지금이 딱 봄. 벚꽃이 가득해서 항상 타이치가 기침을 했던, 그 시점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음. 순식간에 묘한 기시감이 떠오른다. 하지만 지금의 카와니시는 그 때와 조금 달라진 분위기를 풍기며, 시라부를 향해 말했음.
-평생 네 생일 같이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