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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름 - 발신인 불명

  그날은 특별한 날인 듯 조금도 특별할 것 없는 하루였다. 1년에 단 하루, 축복 받아야 마땅한 날이 아니냐며 호들갑을 떠는 주변 인물들 가운데에서 카와니시의 유일한 바람은 그들의 말마따나 자신이 태어난 날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저 조용하게 넘어가는 것이었다. 성대한 파티라던가 선물은 받으면 받는 대로 감사했으나 그런 성가신 것 따위, 없는 게 곱절로 감사했다. 원하지 않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게 뭐 대단한 날인가 싶은 마음이었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태어났고, 다행이도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자랐고, 앞으로도 변수가 없다면 계속해서 살아나갈 보잘 것 없는 인생, 내 존재가 그들에게 무슨 크나큰 축복이라고. 축하에 대한 최대의 선물은 생일 축하한다는 말 한 마디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제 주변인물들에게는 또 다른 입장이었는지 자신의 생일을 알게 된 이들은 하나같이 그냥 넘어가지를 않는 것이다.

  중학교 시절의 친구 놈들은 제 생일을 전교생이 알아야 성이 풀렸던지 학교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축하 노래를 불러댔으며(이후 교장 선생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반성문을 작성해야만 했다), 제 방에 몰래 숨어들어 자신이 잠든 틈을 타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하기도 했고(카와니시는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가 보이는 인영에 놀라 기절 직전까지 갔다), 이벤트랍시고 준비한 촛불에 교실 하나를 홀라당 불태워버릴 뻔 했던 사건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선명했다. 그렇게 매년 반복되는 악몽과도 같은 패턴을 꼬박 3년을 견디며 마침내 입학하게 된 고등학교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문제의 놈들과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생일날의 추억에 데일대로 데인 카와니시는 결국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는 누구에게도 제 생일을 발설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게 된 것이다.

  새 학교, 새 학기의 동급생들과 친해지는 과정에서 으레 물어오는 질문에는 생일에 대한 질문이 빠지질 않았으나 다행히도 제 생일은 좋게 말하자면 새로운 시작인 힘찬 4월,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색해서 죽을 것 같은 4월이었다. 예의상으로 물어오는 질문을 마주할 때마다 카와니시는 제 생일은 이미 지났다느니 챙기기도 애매한 방학 때라느니 이것저것의 핑계를 대며 화제를 전환하곤 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집요하게 물어오는 이는 없었고 그렇게 어찌어찌 저가 원하던 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무탈하게 지나가는 제 생일을 보낸 지 어언 1년째, 카와니시는 또 다시 돌아온 문제의 그 날을 제법 가벼운 마음으로 맞이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날이었다. 잔뜩 피었던 벚꽃은 이미 푸릇푸릇한 잎들로 가려져 볼만한 구석이 없었고,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풀어질 정도의 좋을 날씨도 아주 흐린 날씨도 아닌,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로 널리고 널린 날 중의 하나. 그날은 아무것도 아닌 날이어야 할 예정이었다. 지난 1년간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생일이었으므로 카와니시는 자신의 열여덟 살 또한 순탄하게 넘어갈 것이라고 조금의 의심도 않았다.

  그러므로 지금 이 상황은 카와니시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여지지가 않는 상황인 것이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눈이 일찍 떠진 날이었다. 이 시간에 기상한 것을 스스로도 신기하다 여기며 카와니시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섰다. 인적이 드문 새벽길을 걸으며 카와니시는 생일을 맞아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려는 계획을 되짚어보고는 꽤나 들뜬 마음이 되어 늑장도 부리지 않고 학교에 도착했더랬다. 그렇게 다다른 교내는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춰 도착하던 평소와는 다르게 차분한 공기가 내려앉아있었다, 이른 시간인 만큼 복도에는 그리 학생이 많지 않았으나 교실 앞에 다다르자 익숙한 얼굴 몇몇이 제법 눈에 띠었다. 카와니시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인사를 하고는 복도에 늘어져있는 사물함 중 자신의 번호가 붙여져 있는 칸 앞으로 다가가 벌컥 문을 열었다.

  -툭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들리는 둔탁한 소리에 반사적으로 내려다본 바닥에는 상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자신의 사물함에서 떨어진 것이 분명한 맥락이었으므로 카와니시는 이게 뭘까, 하는 호기심에 상자를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빨간색 상자는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의 사이즈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제법 묵직했다. 카와니시는 상자를 감싸고 있는 금색 리본을 풀어내고 별 생각 없이 상자를 열어보았다. 곱게 포장되어있는 것은 손목시계였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평범했으나 결코 값이 싸지는 않을 거란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카와니시는 조금은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사물함을 들여다보았다. 꽃의 향이 난다. 향기를 따라 시선으로 쫓은 내부에는 자그마한 꽃다발이 놓여있었다. 분홍색으로 물든 드라이플라워. 카와니시는 조심스레 꽃을 집어 들고는 문득 꽃다발에 얼굴을 묻고 향을 깊숙이 삼켰다. 평소 같았다면 그 후에 지독하게 이어질 재채기를 생각해서라도 절대 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고 싶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꽃의 향기에 옅게 묻어있는 또 다른 향기의, 꽃을 전해준 누군가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꽃 사이에 얼굴을 묻자 버석하게 마른 꽃잎의 향이 코끝을 찌른다. 강하지 않다. 그러나 없다고 말하기에는 강렬했다. 메말랐어도 꽃은 꽃이었다.

  카와니시는 이내 꽃다발에 묻은 고개를 들고는 느리게 호흡했다. 당연하게도 꽃 향뿐이었다. 카와니시는 한참을 가만히 눈을 감고 서서 흩어지는 향을 헤집었다.

  주위의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한 것은 향기가 사라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뜨고서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는 대다수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집중되었을 때였다. 4월. 한창 꽃에 관심이 집중되어있을 시기의, 그것도 감수성 짙은 청소년기의 또래들이 모여 있는 학교, 그 한가운데에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키 큰 남학생이란 충분히 시선을 끌 만했던 것이다. 카와니시는 뒤늦게야 상황을 깨닫고 황급히 꽃다발과 선물상자를 사물함에 집어넣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태연하게 행동하려 했으나 몸은 생각을 그대로 따라주지는 않았다. 바닥에 내려놓은 책가방을 들어올리기 위해 헛손질을 두 번이나 하는 꼴을 보였고, 걸음을 옮기려다 일순 제 교실이 어디인지 몇 초간 머릿속을 더듬어야 했다. 마침내 떠올린 제 교실의 방향에 카와니시는 의문을 띄우는 시선들을 애써 피하며 다급한 걸음으로 교실로 들어가 제자리에 앉아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으나 그 또한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 선물은 누가 둔 것이며, 무슨 목적인지에 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4월의 15일. 지극히 평범한 날. 선물을 받을 만한 일이 있었던가 기억을 짚어보았으나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제 생일뿐이었다. 그러나 카와니시는 단 한 번도 그것에 관해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그 누구도 알 리가 없다.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그것에 관해 알게 되었을까. 아련하게까지 느껴지던 출처 없는 선물은 돌이켜보니 의문으로 가득했다.

  카와니시는 책상에 고개를 묻은 채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다 이내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게 누구든 어쨌든 전과 같은 사단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꼭 생일을 축하하는 선물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희박한 가능성에 걸어보기로 했다.

  …그러려고 했다.

  “카와니시. 이거 떨어져 있던데.”

  호기심과 장난기가 가득 묻어있는 목소리였다. 카와니시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지친 듯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하얀색 종이가 내밀어져 있었다. 카와니시는 무심하게 종이를 받아들었다.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손에 와 닿는 질감이 느껴진다. 두껍고, 반듯하고, 뻣뻣하고, 조금은 미끄러운 재질의 그것은 카와니시에게 불안감을 안겨다 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것이었다.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큼지막한 문구가 박혀있는 생일 축하 카드.

  확인 사살이었다.

*

  “어, 카와니시. 생일이라며?”

  “카와니시 군, 생일 축하해.”

  “카와니시, 생일 축하한다.”

  카와니시, 카와니시, 카와니시. 그놈의 생일.

  문제의 선물과 카드 덕에 학교에는, 그러니까 적어도 카와니시를 알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에게 소문이 퍼져나갔다. 카와니시를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화젯거리로 화두에 올라선 것은 ‘카와니시 타이치’의 생일 자체가 아니라 고백 비스무리한 분위기였다. 마가 껴도 제대로 낀 걸 거다. 바라지도 않은 축하를 받는 기분은, 솔직히 그렇게 나쁘지도 않았으나 좋은 것도 아니었다. 누구에게로부터 축하를 받는 내내 묘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치부를 들킨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선물과 함께 두었을 것이 분명한 생일 축하 카드에는 ‘생일을 축하드립니다.’라는 문구의 캘리그라피가 카피되었을 뿐 그 어떤 흔적도 남겨져 있지 않았다. 그 흔한 수신인도 발신인 표기도 어디에도 없다. 단서를 두지 않은 것이다. 정체를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만 같았다. 비밀로 하고 싶은 축하.

  “나는 누구에게도 알려준 적이 없는데 말이지.”

  카와니시는 책상에 고개를 괸 채 한숨을 내쉬었다. 지쳤다. 시달린 것은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았으나 체감으로는 벌써 하루가 다 지난 지 오래였다. 카와니시는 해가 저물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앞으로 돌려 묵묵히 책에 고개를 박고 있는 시라부를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색이 옅고 가는 머리칼이 벌건 빛을 받으니 더욱 옅다. 비스듬하게 이마를 가린 앞머리 끝에 걔 속눈썹이 걸린다. 깜빡인다. 귀를 가져다대면 희미하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마저 날 것 같다.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을 것이 분명할 텐데도 시라부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교과서에 집중을 한 것도 있겠으나 여태껏 시라부를 알아온 바로는 명백한 무시일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익숙해진 탓도 있거니와 애초에 그 탓에 기분이 상했던 적도 없다. 카와니시는 시라부가 책에 집중하는, 혹은 집중하는 시늉을 할 때면 언제나 그 앞자리에 역으로 걸터앉아 시라부의 얼굴을 뚫어져라 뜯어보곤 했다. 콧대가 날렵하다던가, 살결을 만지면 아무런 걸림 없이 손가락이 주욱 흘러내릴 것이라던가, 눈가가 깊게 패여 있다던가. 카와니시는 어쩌면 시라부 본인조차 모를 얼굴의 모습이나 버릇 따위를 세세하게 알고 있었다. 매일같이 방과 후 교실에 홀로 남아 자습을 하는 시라부를 관찰한 탓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장난, 그 다음은 호기심, 지금에 이르러서야 습관이다. 장난에 습관으로 굳혀질 때까지 변함없이 한결같은 시라부를 바라보며 카와니시는 혀를 내둘렀다. 망망대해 같다. 작은 일렁임조차 없이 그저 조용히 흘러가는 바다. 그 어떤 것도 네 세계를 뒤흔들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저로 하여금 이유 모를 감정을 실어다 주었다. 평소와는 다른 스스로가 되어버리는 이질감. 대상조차 알지 못하는 조급함과, 머물러 있는 너라는 바다를 뒤흔들고 싶은 욕망.

 

  카와니시는 턱을 괴고 있던 팔을 내리고 책상에 고개를 뉘인 채 시라부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해도 역시나 아무런 미동도 없다. 너답다.

  “나 오늘 생일인데.”

  심술이었다.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도 있었다. 같은 층의, 반은 달라도 고작해야 벽 하나를 사이에 둔 거리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생일 소식을 시라부가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친하고 안 친하고를 떠나 안면이 있는 사이의 대부분에게 축하인사를 들었으나 시라부만큼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옆구리를 찔러 받아내고 싶은 축하는 아니었으나 반응이 밋밋한 사람일수록 어쩐지 모를 장난기가 도는 것이다.

  “그런데.”

  “해줄 말은 없으신가요, 시라부 씨?”

  장난의 의도가 다분히 섞인 말에 시라부는 그제서야 책에서 눈을 떼고 카와니시를 마주했다. 신경을 건드린 걸까 싶었으나 그런 기색은 조금도 묻어있지 않았다. 늘 그랬듯 무덤덤했다.

  “무슨 말이 듣고 싶은데.”

  “축하한다는 말.”

  당당하게 되받아치는 말에 시라부는 입을 다물었다. 굳게 다문 입술사이에서 한숨소리가 흘러나오는 것도 같다. 카와니시는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태연하게 시라부의 눈을 마주했다. 정적이 일었다. 시라부는 이내 작게 고개를 흔들고 다시 책에 시선을 박았다.

  “듣기 싫어하는 거 아니었던가.”

  “너한테서는 못 들어서.”

  “듣기 싫은 말 굳이 해줘서 좋을 게 뭐야.”

  이번에는 카와니시가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말을 고르지 못한 탓이다. 직접적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시라부가 공부에 집중한 틈을 타 꺼낸 선물상자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지친 표정을 지었던 모양이었다. 무신경한 와중에도 다 살펴보는구나 싶어 제법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유를 묻는다면 답할 말이 없다. 축하인사에 미련 따위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고, 신경을 건드리고자 내뱉는 말은 더욱 아니었다. 단순한 장난이라면 여기에서 멈추는 게 맞는 거였다. 서운할 정도로 무심한 그 말에 그저 수긍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야 했다.

  그러나 마가 껴도 제대로 낀 날이다.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그냥, 너한테는 듣고 싶어서.”

  열어둔 창문 틈새로 바람이 불었다. 노을빛을 실어온 바람은 닿는 모든 곳에 붉은색을 퍼트린다. 빨갛게 물든 네 머리칼이 살랑거리며 흩날린다. 속눈썹이 깜빡거린다. 굳어있던 눈동자가 천천히 위로 들린다. 아, 눈이 마주쳤다. 아무것도 담지 않은 눈에 의문이 실린다. 거짓이 아니다. 파고들어 물어온다면 변명은 하지 않을 참이었다. 그러나 시라부는 그 무엇도 묻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책을 덮고선 짐을 챙겨 일어났을 뿐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시라부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였다. 시라부도 카와니시도 말주변이 있는 성격은 아니었던 탓에 둘 사이에 감도는 침묵은 익숙하다 못해 당연한 것이었으나 이번만은 달랐다. 교실에서부터 지금까지 맴도는 묘한 공기에 카와니시는 소리 죽여 호흡했다.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분위기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입을 떼려 할 때였다.

  “했어.”

  갑작스레 들려오는 말에 놀라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쳐다보았으나 시라부는 예상했다는 듯 시선을 바닥으로 둔 채였다.

  “나는 분명히 했어.”

  “뭘?”

  “축하한다는 말.”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하고부터 곧바로 기억을 되짚어보았으나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저가 기억하는 한 시라부는 오늘 하루 동안 생일에 관한 말은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한 번 했으면 됐지, 두 번은 억울해서라도 못 해.”

  딱 잘라 말하는 탓에 항의할 틈조차 없었다. 거짓을 말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거짓이고 진실이고를 떠나 고작 축하인사 하나에 그토록 억울해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려 하던 찰나 시라부는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제 집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도망가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이제는 더 캐물을 수도 없다.

  문득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의 존재가 느껴졌다. 카와니시는 그것에 코를 묻고 다시 한 번 향을 맡았다. 향기는 희미했으나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묘한 기분이었다.

*

  봄이라고도 여름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날이었다. 날씨는 하루에도 사계절을 오가며 추웠다가도 숨도 못 쉬게 더웠다. 올해의 5월은 그렇게나 이상한 달이었다. 그러나 여느 때처럼 고요했다. 날이 지나고 달이 바뀌자 문제의 생일은 어느새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힌 지 오래였다.

  그러나 카와니시는 아니었다. 그날의 시계와 꽃다발은 여전히 책상 한 구석을 가지런히 차지하고 있었다. 누가 준건지도 알 수 없는 선물을 몸에 지니고 다니자니 온 신경이 거기로 쏠려버렸고 버리자니 죄책감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는 가끔 만지작거리거나 남몰래 손목에 대어보는 것이 전부였다. 선물의 주인을 굳이 밝혀낼 생각은 없었으나 지금의 기분이 무뎌질 날이 오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이렇게 두고만 볼 작정이었다. 그날로부터 이 주가 넘게 흘렀으므로 이전의 카와니시와 관련한 그 일에 대한 관심은 다 타버린 불씨였다. 가끔 장난스럽게 궂은 질문을 던지는 사내놈들은 있었으나 그때뿐 더 이상 그에 관해 물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본인들의 일이 아니었으니 신경이 쓰일 화제가 아닌 거였다.

  그런 카와니시의 텅 빈 손목에 대해 먼저 물어온 것은 시라부였다.

  점심시간이었다. 배가 고프지 않다며 식사를 거르겠다는 시라부에 카와니시는 교정의 뒤뜰까지 뒤따라 한사코 거부하는 시라부의 입에 기어코 주먹밥을 입에 물려주었다. 시라부는 주먹밥을 입에 욱여넣는 내내 뚱한 표정으로 카와니시를 쏘아보았다. 싫다는 표정으로 꼭꼭 씹어 삼키는 시라부가 기특해 물병을 건네자 그것마저 바지런히 받아들고는 끝내 모조리 먹어치운다. 불만이 가득 담긴 눈으로 찌르는 듯한 시선이 아니었다면 대놓고 웃어버렸을 거라며 카와니시는 헛기침을 뱉으며 애써 기분을 억눌렀다.

  “시계는?”

  한바탕 욕을 들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참이다. 그러나 그 입에서 튀어나온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에 카와니시는 그대로 멈춰버린 채 시라부의 질문을 곱씹었다. 시계, ……손목시계. 뒤늦게 알아차리고 시선을 마주하자 시라부는 여전히 불만스런 표정으로 카와니시를 흘낏거리고 있었다.

  “준 사람을 모르니까 하고 다니기 좀 그래서.”

  들어본 적 없는 질문에 당황해 조금 변명하는 듯한 말투가 되고 말았다. 시선이 느껴진다.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해 카와니시는 벤치 정면에 자라나있는 나무의 끝가지를 응시했다. 뒤뜰의 나무는 지난 4월, 교내의 많은 벚나무 중에서도 가장 멀리 꽃잎을 뻗었던 나무다. 교실의 창문 밖으로 있는 힘껏 손을 뻗으면 여린 가지 하나는 쉽게 꺾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한창 꽃이 지는 철이면 부는 바람에 꽃잎이 교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런 걸 기억하고 있는 건, 기억하게 된 건,

  그러니까, 이게 언제부터였더라.

  그 언젠가, 교실에 늦게까지 남아있던 시라부를 기다리고 있을 때, 창문을 넘어 들어온 꽃잎이 시라부의 머리 위에 묻었던 때. 책에 열중한 시라부의 머리에 손을 가져가 꽃잎을 떼어주며 “꽃.” 하고서 웃었을 때.

  “이왕 준 거 잘 차고 다니지.”

  지금처럼, 시라부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되어버리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시선을 나누던 그 때.

  어쩌면 그 때부터.

  카와니시는 손을 들어 오른쪽 손목을 매만졌다. 비어있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허전함은 그 무게를 오랫동안 알아차리지 못한 대가였다. 시라부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말하지 못했던 만큼 오래 앓았을 것이다.

  “이제는, 꼬박꼬박 차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디선가 꽃향기가 풍기는 것 같았다. 벌써 꽃이 다 져버린 5월이었다.

*

  “켄지로.”

  “왜.”

  “생일 축하해.”

  이른 아침이었던 탓에 아직 채 정신도 차리지 못하던 시라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젯밤, 문자로 집 앞 골목에서 기다리겠노라고 일방적인 통보를 한 카와니시에게 온갖 불평을 쏟아내려던 참이었다. 시라부는 눈을 동그렇게 뜬 채 그저 멍하니 카와니시를 바라보았다.

  “이런 건 말로 해야 알아.”

  “…….”

  “글씨 말고, 카피된 엽서도 말고.”

  카와니시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바람에 엉망이 된 시라부의 앞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시라부는 코앞까지 다가온 카와니시의 얼굴에 홀린 듯 눈을 깜박이다 이내 정신을 차리곤 더듬더듬 물었다.

  “너……어떻게 알았어.”

  “너는 어떻게 알았는데?”

  대꾸할 말이 없어 시라부는 입을 다물었다. 들킨 것이다. 카드도, 선물도, 꽃다발도. 어쩌면 부러 교무실에 숨어들어가 생활기록부를 훔쳐본 것도 들켰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기억도 안 나는 언젠가부터 키워온, 아닌 척 들키기를 바랐던 이 감정도.

  “켄지로, 나한테 할 말 없어?”

  확신이 들었다. 카와니시는 모조리 알고 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능글거리는 표정에 시라부는 금방이라도 풀어질 것 같은 얼굴을 애써 감추었다.

  “무슨 말이 듣고 싶은데.”

  턱을 떨린다. 손끝에 잔뜩 힘이 들어가는 것을 알았다. 마주잡은 두 손은 하얗게 물들어버렸을 것이다.

  “좋아해.”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카와니시의 입에서 뱉어진 그 세 글자만이 귓가를 맴돌며 온몸을 두드린다. 의식적으로 호흡하며 숨을 골랐다.

  “이것도, 말로 해야 알고.”

  “…….”

  “그래서 켄지로, 할 말 없어?”

  불을 붙이듯 채근하는 말에 목구멍에 걸린 말이 움찔거렸다. 홀린 게 틀림없다. 눌러 담아도 새어나오는 말은 기다렸다는 듯 혓바닥을 두드렸다. 움틀거린다. 간질거린다. 참을 수가 없다.

  “좋아해, 타이치.”

  시라부는 자신의 표정이 아무렇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숨길 방법이 없어 시선을 피해버렸다. 카와니시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들었으나 짜증 섞인 말조차 할 수 없다. 한참 바람 빠지듯 작게 웃어대던 카와니시가 어깨를 붙잡고 눈을 마주했다. 닿아오는 온기에 놀라 저도 모르게 시선을 마주해버렸다.

  “좋아해, 켄지로.”

  얼굴 앞으로 꽃다발이 내밀어진다. 시라부는 갑작스레 눈앞을 가득 메우는 화려한 색채에 놀라 얼떨결에 품에 안아들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드라이플라워였다.

  “발신인, 카와니시 타이치.”

  귓가에 속삭여 오는 목소리에 와이셔츠 밖으로 드러난 목덜미가 잘게 전율한다. 간질거리는 기분에 시라부는 낮게 호흡했다.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카와니시 타이치가 웃는다.

  “생일 축하해, 켄지로.”

  손을 겹쳐오는 카와니시의 손목에는 시계가 걸려있었다.

본 페이지는 편의상 존칭을 생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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