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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 고백의 밤

  “카와니시, 오늘은 왜 혼자야? 늘 같이 오는 친구 있었잖아.”

  “모르겠어요……, 여기로 오기로 했는데.”

  “앉아서 내리 술만 마셨나 보네. 괜찮아?”

  “아니요, 네, 당연히 괜찮죠. 얼마 안 마셨어요.”

  세미는 익숙하게 카와니시의 앞에 잔을 놓고 술을 한 잔 따랐다. 이 단골손님은 대부분 친구와 함께 와서 가볍게 두세 잔쯤 마시고 돌아가는 편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혼자 술을 마시는 것이 의외였다. 게다가 전할 것이 있기도 했으니까.

  “무슨 일이기에 이래.”

  “정말 별일 아니에요, 아니, 중요한 일이 있어요.”

  하지만 표정이 너무 심각해 보여, 세미는 우선 이야기를 들어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잔을 비우는 속도도 빠른 것 같아 취했냐고 묻자 당장이라도 체할 것 같은 표정을 한 카와니시에게서 차라리 취하고 싶어요, 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손님의 개인적인 사정에까지 관심을 가지는 취미는 없었지만 결국에는 말을 꺼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얼굴을 했다. 무슨 일이 있기에 이래, 말해 봐. 한 마디 했더니 그는 세미 씨……, 저 너무 긴장돼요. 답지 않게 심각한 목소리를 한다.

  좋아하는 애가 있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거든요……. 제가 벌써 스물다섯이에요, 자그마치 9 년을 좋아했고, 이제는 너무 당연해서 힘든 줄도 몰랐어요. 그러니까, 열여섯에 처음 만났는데 너무 예쁘더라고요. 좀 차갑게 생긴 편이고 잘 웃지도 않는데 가끔 웃어 주면 그게 정말로, 아, 말로 설명이 안 돼요. 정말 예쁘거든요.

  처음에는 그냥 예뻐서, 동급생 중에 그렇게 생긴 애가 몇 안 되니까 눈길이 갔어요. 그러다가 저 애는 언제 웃나, 궁금해지고. 궁금한 점이 생기면 더 자주 보게 되잖아요, 세미 씨, 여자 친구 있으시니까 알겠지만요……. 그렇게 보다가, 정신을 차리니까 없으면 찾고 있었어요.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그 애가 아파서 결석했던 날 하루 종일 그 애 생각만 하고 있다는 걸 알았고, 너무 놀라서 며칠은 쳐다도 안 봤어요. 밥을 먹을 때도, 수업이 끝날 때도 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을 했죠. 수업 시간에는 앞만 보고, 쉬는 시간에는 엎드려 자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실에서 뛰어 나갔어요. 그러다가, 그 애가…… 제 책상을 두드려서 마주한 순간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너무 예뻐서 키스라도 할 뻔했으니까.

  고백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걸 할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어요. 그럴 이유가 조금 있어서요, 고백은 안 했고, 그 애는 지난 9 년간 애인이 세 번이나 생겼고요. 대학교 때는 잠깐 멀어졌었어요. 학교도 멀었고, 맞아요, 제가 멀리 있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멀리 있었어요. 연락도 안 하고. 잊었다고 생각까지 했나……, 잊고 살 수 있다고 확신했어요. 스물에는 저도 여자 친구가 생겼고. 여자 친구하고 미래를 꿈꿀 정도로 저는 잘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왜 또 이렇게 됐더라……, 스물둘이었나, 그랬던 것 같네요. 갑자기 그 애가 연락을 해 왔어요. 기껏 피했는데, 고등학교 동창들한테 물어 물어 연락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데, 정말 우스운 게…… 며칠 전에 여자 친구하고 헤어져서 술을 마시고 깬 참이었는데 여자 친구 생각은 하나도 안 나고 교복을 입고 있던 그 애의 얼굴만 떠오르는 거예요. 그때 알았어요, 저는 이 앨 평생 못 잊을 거라고. 저만 착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제가 있는 곳으로 파견을 가게 됐다고, 혹시 만날 수 있겠냐고 하는데 심장이 엄청 뛰었어요. 너무 보고 싶어서 서러울 정도로…… 예, 그랬어요.

  그렇게 3 년이에요, 세미 씨. 그 애 근처에 살면서, 매번 만날 때마다 설레고, 혹시 걔가 또 다른 사람을 만날까 봐 너무 겁나서 못 견디고 살던 생활이 벌써 3 년이 됐어요. 그런데 그 애가 저 다시 만난 후로는 여자 친구도 안 사귀고요, 남하고 어울리는 건 싫어하면서 자꾸 잘해 주니까, 희망이 생기는 거예요. 주말마다 같이 있어 주고, 좋아하는 영화도 같이 보고, 저번에는 제가 먹고 싶다고 해서 스키야키를 만들어 주기까지 했다니까요. 아니라고 생각을 어떻게 해요. 그래도 진짜 안 되는 거지만, 너무 하고 싶어서.

  오늘, 그 애 생일이에요. 그래서 아까 고백했어요……. 그런데 그게, 제가 좋아한다고 했는데 표정 변화도 없는 거예요. 알았어, 이따 저녁에 평소에 가는 거기에서 기다려, 그렇게 말하고는 점심시간 끝났다고 회사로 들어가 버렸어요.

  “저 이제 차일 것 같다고요, 세미 씨. 어떻게 해요.”

  카와니시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술을 두 잔 더 비웠다. 하지만 알코올의 양과 반대로, 정신은 점점 또렷해지는 모양이었다. 세미는 혀를 찼다. 지금 말하는 ‘그 애’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던 탓이다. 하지만 ‘그 애’와 아직도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 그 점이 의외일 지경이었다. 차마 카와니시의 심각한 얼굴에다 대고 그 말을 뱉을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으므로 세미는 입을 다물고 카와니시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하지만 솔직하게는 괜찮겠지, 라고 생각했다.

  세미의 단골인 카와니시 타이치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와서 술을 마시고 갔는데, 언제나 친구와 함께였다. 세미보다도 작은 키의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카와니시와 친구라고 했다. 차가운 얼굴에 자주 웃지 않는 편이었지만 카와니시가 취기가 돌기 시작하면 그를 향해 상냥하게 웃어 주는 했다. 그 웃음은 더없이 다정했고, 카와니시는 그에게 취한 듯 굴어서 세미는 그들이 평범한 친구 사이가 아님을 직감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미는 아직도 친구 사이라는 카와니시의 말에 오히려 놀라고 말았다. 틀림없이 사귀고 있거나, 그 비슷한 사이일 것이라고.

  “걱정하지 마, 너 절대 안 차일걸.”

  대화를 나눈 적은 별로 없지만, 그 ‘친구’의 성격을 감안하면 오히려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하느냐고 물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위로에도 표정이 나아질 틈이 없는 카와니시에게, 세미는 안쪽 주머니에서 열쇠와 쪽지 한 통을 내밀었다.

  “시라부 씨가 맡기고 가셨더라. 생일 축하드린다고 전해 줘.”

  ‘이따가 타이치가 오면 주세요. 제가 오늘 좀 바빠서 직접 전할 수는 없거든요. 아, 쪽지 내용은 보지 마시고, 혹시 울어도 쫓아내지 마시고요.’ 두 시간쯤 전에 와서 용건만 건네고 가버린 그는 어쩌면 그의 반응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세미 씨…….”

  꼭 당장 울 것 같은 얼굴로, 카와니시는 열쇠를 손에 쥐고 뛰쳐나갔다.

  “야, 야, 계산은! 카와니시!”

  그가 있던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쪽지 위에, ‘XX멘션 12010호. 같이 살 거면 지금 와.’

  카와니시가 두고 간 잔에 남은 얼음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 뭐, 며칠 후면 또 평소와 같은 얼굴로 두 사람이 함께 마시러 올 테니 오늘 하지 않은 계산은 그 때 하라고 해도 괜찮겠지. 세미는 별 수 없다는 얼굴로 쪽지를 도로 접어 안주머니 안에 넣었다. 누군가에게는 가장 행복한 밤이었다.

본 페이지는 편의상 존칭을 생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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