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오니 - 크레센도
폭죽 소리가 머리를 울린다. 나는 두 팔을 벌려 선물 꾸러미를 품에 안았다. 포장지에는 별과 달이 자잘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나는 내용물이 망가지지 않도록 테이프를 살살 떼어냈다. 이번엔 병아리가 그려진 HB연필세트……. 우리 아들은 너무 좋겠다~. 어때? 마음에 들지? 그녀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매년 포장지는 달랐지만 종류는 단 하나, 학용품이었다.
화려한 고깔모자의 향연 그리고 한 가운데에서 연필세트를 품고 있는 아이. 손에 식은땀이 배어나온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눈동자를 굴렸다. 맞은편에 앉은 유우토가 손수 접은 딱지를 다시 가방에 넣는 중이었다. 아. 나는 순식간에 눈가가 화끈해지는 것을 느끼고 고개 숙여 울먹였다. 앞머리가 쳐져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 날, 나는 누구에게도 선물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는 생일파티를 열지 않기로 했다. 왜냐고 묻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세미시라] 크레센도
배구부에 들어간 것은 부모를 향한 나의 작지만 위대한 반항.
나는 집 근처의 토요쿠로 중학교에 진학했다. 집주소를 변경하면서까지 나를 명문 사립중학교에 입학시키고자 했던 그들의 노력은 단속에 걸리는 바람에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도 그들은 품격 있는 집안 행세를 포기할 수 없었나보다. 어머니가 복권에 당첨되시지만 않았어도 나는 이렇게 살지 않을 수 있었을까.
중학교 입학설명회를 다녀온 후, 그들은 내가 서예부나 골프부 같이 ‘있어 보이는’ 동아리에 들어가길 꿈꿨다. 안방 모니터에는 매번 4만 엔대의 다양한 골프 드라이버가 띄워져 있었다. 먹을 갈면서 심신을 단련해보는 건 어떻겠니? 나는 네가 고급진 취미를 가졌으면 좋겠어. 그럴 때마다 나는 밥알이 죽이 되도록 씹었다. 식도로 뜨끈하게 넘어가는 밥은 버거울 정도로 느리게 내려갔다. 그때까지는 서예부에 들어갈 작정이었다. 입부서 제출 마감일에 선배가 내 손에 무작정 배구부 홍보지를 쥐어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평소처럼 보도블럭 사이의 홈을 따라 걷고 있었다. 홈을 따라가다 보면 곧 인도가 끝나는 지점이 오는데 그 때 고개를 들면 바로 토요쿠로 중학교 정문이 서있다. 그 날도 나는 어스름한 아침 등굣길에 올랐다. 모두가 몽롱한 얼굴로 발을 질질 끄는 모습은 좀비영화를 절로 연상시켰다. 그 때, 가쿠란 깃 위로 한 방울, 콧잔등 위로 한 방울. 빗방울이 떨어졌다. 난데없는 먼지잼은 방금 전까지 죽어가던 모든 학생들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도 그들을 따라 가방을 머리에 얹고 무작정 교문으로 잰걸음을 놓았다. 어젯밤에 챙겨놓은 유인물이 뛸 때마다 삐죽삐죽 머리를 내밀었다.
교문 안쪽은 동아리 홍보부스를 치우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는 이미 서예부에 들어가기로 정했기 때문에 앞만 보고 정문을 통과했다. 하지만 인파를 뚫고 나아가는 일은 160 초반대의 나에게는 무리였다. 그래서 나는 파도에 쓸려가기로 마음먹고 하체에 힘을 풀었다. 힘을 들여서 걷지 않아도 언젠가는 그곳에 도착해있으리라. 하지만 불쑥 튀어나온 손 하나가 팔뚝을 잡는 바람에 나는 길가에 닻을 내리고 말았다. 저기, 이거 한 번만 봐줘! 그는 지금 와쿠타니미나미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카와타비 슌키. 꼿꼿이 서있었을 머리에서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내게 입부서와 홍보지가 끼워진 투명파일을 손에 쥐어주곤 냅다 도망쳤다. 그의 뒷모습이 작아질 때마다 빗발이 더 굵어졌다. 예비종이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다음 교시에 쓰일 유인물을 찾기 위해 가방을 뒤적였다. 손에 안경집과 손수건이 치였다. 그러다가 아침에 대충 쑤셔 넣었던 투명파일이 손에 잡혔다.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나 해볼까. 가방 오른쪽 주머니에서 간식으로 싸온 팩우유도 같이 꺼냈다.
‘방과후에 운동도 하고, 착한 (특히 주장이 제일 착해! ←아님^^) 선배랑 동기도 사귀고, 대회에서 상도 타자! 토요쿠로 중학교 배구부에 어서 오세요!!★’
와 젠장……. 팩 우유에 거칠게 빨대를 꽂아 넣었다. 이 배구부엔 진지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는 건가? 문방구에서 산 색지에 손글씨로 채워진 홍보지는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아니지. 색지를 컬러프린트 할 생각은 오히려 감탄을 자아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음 글을 읽어나갔다.
‘토요쿠로 중학교 배구부는 21년 역사의 동아리야. 스포츠 동아리 중에서도 우리만큼 열정적인 동아리도 없지. (←이건 동감) 그러니까 이걸 읽고 있는 너도 우리랑 같이 재밌게 배구해보지 않을래? 초등학교 때까지는 엄마 아빠한테 휘둘리기만 했다면 이번엔 네 스스로 코트 위에서 자유롭게 날뛰어보는 거야! 부원 모두가 주도권을 가질 수 있어. 배구는 우리 손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는 스포츠니까. 사실 이 홍보지를 보고 몇이나 들어올지는 모르겠다. 네가 어느 동아리를 들든 좋은 부활동을 해주길 바라! (이왕이면 우리 동아리에서!) 이상! - 토요쿠로 배구부 일동’
정신을 차리자 나는 교실 모퉁이에 머리를 박고서 홍보지를 읽고 있었다. 불온서적을 읽고 있는 듯 온몸으로 종이를 가린 채로. 홀린 듯이 눈을 감고 코트 위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를 상상해 보았다. 내 손끝에서 시작한 경기가 내 손으로 마무리 된다면. 아…. 얼마나 짜릿할까. 부모님도 코트 위에선 나를 막을 수 없다.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희열에 콧등이 찌잉 울렸다. 이정도면 그들에게 괜찮은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샘솟았다. 나는 자리로 돌아가 필통에서 가장 비싼 펜을 찾았다. 1학년 5…반 시라부 켄, 지로.
정확하게 일주일 뒤 나는 그들에게 이미 제출한 배구부 입부서를 내밀었다. 아버지는 일주일동안 발코니에서 담배만 피우셨고 입부서를 쥔 채 바들대던 어머니의 손은 팔짱 속으로 사라졌다. 아마 머릿속에서 그 도톰한 손바닥은 몇 번이고 나를 내리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손을 올리지 않았다. 둘은 ‘교양있는’ 사람들이니까.
배구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로드워킹을 하며 체력도 늘었고 무엇보다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다. 나는 공격적인 스타일의 세터, 부모에 대한 모든 분노를 플레이 스타일로 승화시켰다. 날카로운 토스로 경기의 흐름을 몰아가는 것은 내 주특기였고 이는 다른 중학교에서도 꽤 알아주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시라토리자와와 키타가와 제1중학교가 있는 이상 우승은 감히 바랄 수조차 없었다. 대신 나는 관중석에서 새로운 꿈을 가지게 되었다. 시라토리자와 학원 배구부의 세터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니, 되어야만 했다. 현 내 최고의 윙스파이커 우시지마의 공이 코트에 내리꽂힐 때마다 가슴이 저릿했다. 저 사람에게 토스를 올리고 싶어. 힘만으로도 모든 것을 압도하는 플레이. 그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나를 포기할 자신이 있었다.
“시라토리자와에 가고 싶어요.”
그 날 그들은 나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우리 아들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나봐요. 이제 네 길을 찾았구나. 고생 많았다. 나는 아버지의 목 뒤에서 눈을 감고 내일 연습경기를 이미징했다. 오늘 에이지가 컨디션이 좋았으니 내일은 그놈한테 토스를 자주 올려야지. 내일까지도 이용가치가 있어야 할 텐데.
나는 평소에도 전교 5%안에 들었지만 명문 시라토리자와에 가기 위해 더 최선을 다해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교 후부터 자정까지 이어진 과외는 사람의 성질을 긁어놓았다. 애초에 그렇게 상냥한 사람도 아니었지만 내 성격은 이 시기에 다 버린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수개월 후 나는 일반입시 전형으로 시라토리자와에 합격했다. 우편함에 넣어져있는 합격통지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어머니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아버지는 호쾌한 웃음을 지으며 내 머리칼을 흩트렸다. 나도 그 날 만큼은 진심을 다해 웃었다.
그들은 이번에도 내가 학교에서 밀어준다는 승마부나 궁도부에 들어갈 것을 기대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웃기지마. 나는 다시 배구부에 들어갈 거야. 자식에 대한 기대는 일찍이 떨어뜨리는 것이 좋다. 졸업한 뒤에 뜻을 펼치면 더 골치 아플 것이 뻔하지. 나는 기숙사로 떠나기 직전에 3년 전처럼 그들에게 배구부 입부서를 내밀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뺨을 맞았다. 나는 다녀오겠다는 말도 하지 않고 짐을 챙겨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손자국은 기숙사에 도착할 무렵에 다 사라졌다.
배구부에서 가장 엿 같은 것은 감독이었다. 경기가 잘 풀렸어도 본인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날 실책한 선수들의 뺨을 때리는 일은 일상이었다. 가끔 우시지마 씨에게 토스를 올리지 않고 투어택으로 점수를 내거나 토스가 불안하기라도 하는 날은 연속으로 뺨을 맞았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다른 부원들에게 티는 안 냈지만 정말 더럽게 아팠다. 나는 언제부턴가 저린 뺨을 쥐고 체육관 뒤편에 몸을 숨기는 습관이 생겼다. 감독에게 들킬까봐 큰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저 연신 벽에 머리를 찧었다. 이마에 생채기가 날 때 즈음 그는 항상 소리 없이 다가와 내 이마 위에 손을 포개놓았다. 같은 세터라 그런 걸까? 그는 매번 나를 살뜰히 챙겼다.
그에게 처음 사랑을 느낀 것은 동아리 신환회에서였다. 부원 전체 스케줄에 맞추다 보니 신입생환영회는 4월 말에 열렸다. 우리는 학교 근처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같은 세터라는 이유로 나란히 앉게 되었다. 후배이니만큼 이것저것 챙기려 했는데, 문제는 그가 항상 나를 가로막곤 본인이 다 알아서 해오는 것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침대 위에서 쿠션을 끌어안고 있던 세미가 입술을 불퉁하게 내민다. 창밖을 보아하니 정오가 다 되어가는 듯하다. 그냥 옛날 생각이요. 음, 다시 신환회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는 기숙사 근처 백화점의 쇼핑백을 챙겨왔었다. 꽤 큰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에 신환회 내내 주변 부원들의 장난 섞인 핀잔을 받았다.
배부르게 식사를 마친 후 타이치와 함께 1학년 기숙사로 향하는 길이었다. 3학년은 계산을 위해 레스토랑에 따로 남는다고 했고 2학년은 우리를 배려한답시고 저 뒤에서 우리를 따라오는 중이었다.
“시라부, 잠깐 볼래?”
어느새 다가온 그가 나를 불렀다. 그동안 선배 중에 나를 따로 불러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몹시 당황스러웠다. 타이치가 그를 경계어린 눈초리로 흘겨보았다. 그 때는 아직 세미 씨를 잘 알지 못했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한참동안 어색하고 팽팽한 기류가 흘렀다. 타이치가 물러설 생각을 않자 결국 그는 내 손목을 잡고 나를 학교 광장으로 데려갔다. 그가 걸을 때마다 커다란 쇼핑백이 다리에 치였다. 고개를 돌리자 타이치가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만들곤 흔들어 대고 있었다.
광장 분수대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내게 문제의 쇼핑백을 건넸다. 딱 봐도 무거워 보이던 그것은 막상 들어보니 가볍게 훅 들려버렸다. 위에서 보이는 것은 비닐 포장지 속의 연갈색 털 뿐이었다. 이 날씨에 코트일리도 없고. 당최 감이 오지 않았다.
“생일 축하해! 이런 거 좋아하려나?”
이런 거? 포장지를 거칠게 뜯어내고 내용물을 꺼내자 곰인형이 나왔다. 그를 한 번 올려다보고 다시 인형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계속 실실 웃고 있었다. 인형의 정수리 부근을 긁자 손톱 사이로 복실한 털이 느껴졌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처음으로 받은 선물, 그리고 처음으로 학용품 세트가 아닌 선물이었다. 나는 곰인형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좌우로 살폈다. 그러면 그는 나를 따라 요리조리 나의 표정을 관찰했다.
“근데 저 오늘 생일 아닌데요?”
라고 물었다.
“알고 있어. 근데 뭐랄까, 다른 애들이랑은 차별화를 두고 싶어서……. 왜? 마음에 안 들어?”
조금? 빈말이라도 마음에 든다며 좋아하리라 생각했는지 그는 조금 주춤댔다. 가로등 옆이라 얼굴이 참 잘 보였는데 아주 시뻘게져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지, 어쩌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웅얼대는 그를 심드렁하게 쳐다보았다. 정말 별로야? 손가락을 살짝 벌리고 틈사이로 나를 바라본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게 내 사랑의 시작이었음을 기숙사 음료수 자판기 앞에서 깨달았다.
그 뒤로도 그는 나를 따라다니며 갖은 노력을 퍼부었다. 돌이켜보면 세미가 내게 관심을 얻기 위해 이래저래 참 애썼다. 그리고 나는 그 노력이 싫지 않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함께하는 시간이 늘었고 부원들 사이에서도 세미와 나는 한 세트로 여겨졌다. 역시 싫지 않았다.
*
5월 말에 난데없는 열병이 찾아왔다. 온몸이 타들어가는 통증에 나는 이주일 동안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 온 몸의 근육이 비틀리는 듯 했고 뼈 마디마디가 쑤셨다. 이메일 목록은 그 날의 숙제를 알려주는 반친구들과 배구부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 중에서도 세미 에이타는 혼자서 목록의 6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참 별거 아닌 말만 보냈다. 그 날의 날씨를 알려주거나, 학교에 핀 꽃 사진을 보내주거나, 몸 상태를 묻거나. 마지막 말은 언제나
‘보고싶어 시라부.’
내 마음을 쥐어흔들었다.
개교기념일 전 날 그에게서 또 이메일이 왔다. ‘내일 집으로 찾아가도 될까? 감독님이 인터하이 출전사항은 너도 꼭 알아야 한다고 당부하시네. 집주소는 감독님이 주셨어!’ 그가 이제는 마지막 선까지 넘어오려고 들었다. ‘네. 10시에 오세요.’ 자존심조차 세우지 못했다.
다음 날 찾아온 그는 현관에서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는 내가 집으로 초대한 유일한 학교 사람이기도 했고 서글서글한 미소는 쌀쌀맞은 나와는 달랐으니까. 내가 어머니였어도 그에게 더 마음이 갔을 것이다. 나는 계단 난간에 몸을 걸친 채 그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동안 봐왔던 그의 사복센스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는데 오늘은 웬일로 멀끔하게 차려입었다. 누구한테 물어봤을까? 제일 먼저 떠오른 의문이었다. 어머니에게 홍차세트를 건넨 그가 고개를 들어 내게 미소 지었다. 화끈해지는 얼굴에 나는 고개를 휙 돌리고 그가 내 방에 찾아올 수 있도록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어어, 하면서 달려온 그가 어깨를 감싸 안는 바람에 주저앉을 뻔했지만. 쿵쾅대는 심장소리를 들킬 리가 없는데도 그에게서 상체를 조금 떼어냈다.
그는 인터하이 이야기를 마친 후에도 돌아갈 생각을 않았다. 세미가 회전의자에 앉아 학교 이야기를 풀면 나는 침대에 누워 그가 재잘대는 양을 보았다. 세미는 턱선이 날렵하고 콧대가 참 시원하게 솟아있다. 무엇보다도 내가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낯간지러운 애정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그 애정의 형태가 애석이든 사랑이든 아무래도 좋았다. 성가시지만 자꾸 두근대버렸으니까.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 나는 단지 아끼는 후배일 뿐인데. 내가 그를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으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가 알게 된다면 얼마나 당황해할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망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혼자 땅을 파자 다시 열이 나기 시작했다. 더 생각하다가는 일주일 더 학교를 쉬어야할지도 모른다. 그를 빨리 돌려보내야만 했다.
“언제 가세요? 인터하이 때문에 오신 거 아니에요?”
“걱정되니까 계속 있는 거지. 어쩌냐, 열병은 약도 없다는데~.”
용기 내어 물었지만 그는 의자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앞뒤로 흔들어대기나 했다. 얼굴은 거울로 보지 않아도 이미 새빨개졌을 것이 분명했다. 더 용건 없으면 돌아가 주세요. 피곤하네요. 나는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당기고 창문 쪽으로 돌아누웠다. 의자가 삐걱였다. 그럼 나 조용히 있을 테니까 옆에 있게만 해줘. 응? 시라부우. 매트리스가 꿀렁인 걸 보니 그가 침대에 몸을 걸친 듯했다. 그가 정확히 어떤 자세로 내 곁에 있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방금 전보다 더 어지러웠고 가슴도 울렁거렸다. 그가 날 후배로서 사랑하는 게 너무 야속했다.
“헷갈리게 하지 마세요. 짜증나니까…….”
입 안에서만 맴돌고 있던 말이 툭 튀어나와버렸다. 이건 그를 향한 명백한 실례였다. 아까의 분위기는 어디가고 정적만이 방안을 채웠다. 간간이 꿀렁이던 매트리스는 미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엄지를 올려 앞니로 손톱을 살짝 물어뜯었다. 느릿하게 몸을 돌려 그를 마주했다. 세미는 무릎을 꿇고 침대에 팔뚝을 걸친 채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꺼낼지. 두려웠다.
“뭐가 헷갈리는데?”
“네?”
“뭐가 헷갈리냐고.”
변명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목이 매어버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세미의 두 입술이 맞물리자 뜨끈한 눈물이 콧대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불을 거칠게 걷어내고 그를 원망 섞인 눈으로 보았다. 울렁이는 시야 너머로 보이는 한결같은 눈빛은 나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자꾸 잘해주지 말란 말이에요! 선배가 그렇게 바라볼 때마다 제가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혼자 사랑하고 혼자 단념하는 게 얼마나 비참한지 아시냐고요!”
결국 질러버렸다. 좋아한다고 말해버렸다. 젠장, 젠장.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힘 조절을 잘못했는지 금세 살갗이 까져 눈물이 흐를 때마다 쓰라렸다. 그는 말없이 책상 위에 놓인 곽티슈를 가져다가 이불 위에 내려놓았다. 고백 아닌 고백을 듣고도 별 반응이 없는 그가 야속해 이불을 감싸쥐었다. 세미가 침대 위에 앉자 매트리스가 한번 꿀렁였다.
“울지마…. 뚝해… 뚜욱…. 네가 울면 내가 더 속상해.”
그가 내 머리를 끌어당겨 제 어깨 위에 얹었다. 어깨를 들썩일 때마다 골이 울렸다. 하지만 그의 품이 너무나도 상냥해서, 젠장 맞게 따듯해버려서 더 크게 흐느꼈다. 그의 셔츠위로 눈물이 스며들었다.
“시라부는 좋겠네. 남자친구가 이렇게 위로도 해주고.”
아…! 등을 크게 쓸어내리는 손에서 느낄 수 있는 건 그의 사랑, ‘지극히 개인적인’ 그의 사랑이었다. 나는 아예 심장소리가 그에게 충분히 닿을 수 있도록 몸을 기대었다.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한참동안 어깨에 얼굴만 비볐다. 그의 셔츠는 이제 완전히 축축해져 어렴풋이 살구색을 띄고 있었다. 나는 그가 몸을 떼어내려고 하면 다시 끌어당겨 우리 사이의 작은 빈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
열병은 성장통과 같이 왔었는지 나는 그 한 달 사이에 7cm가 커버렸다. 그래봤자 아슬아슬하게 170이 조금 넘게 되었지만 시합 때 대놓고 상대에게 무시당하던 시절보다는 나았다. 근데 시라부, 너무 오래 멍 때리면 머리 나빠진다는데. 그가 쿠션에 턱을 괴고 웅얼댔다. 좀 조용히 하세요. 그에게 지우개를 던졌다. 그의 이마에 정통으로 명중한 지우개가 창가로 가볍게 튕겨나갔다. 옅게 흔들리는 지우개 옆에 갈색 곰과 흰색 곰이 나란히 햇살을 맞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요.”
“꽤 감동이었나 봐? 기억하는 거 보면.”
“어이가 없네.”
1년이 지나 그는 내게 또 쇼핑백을 건넸다. 이번에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꽃다발까지 챙겨왔다. 분홍색 튤립은 흰색 습자지에 싸여있어 퍽 보기 좋았다. 코를 가져다대자 진한 꽃 냄새가 풍겨왔다. 가슴 속에서 아지랑이가 절로 피어올랐다. 쇼핑백 안에는 역시나 곰인형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새하얀 녀석이었다. 설마 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미친 듯이 다리를 떨며 애써 허공을 응시한다. 역시 맞나보네. 탄식을 내뱉자 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입 가까이에 주먹을 내밀었다.
“자 자! 그래서 시라부 켄지로 님, 올해 생일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평소였다면 인상을 찌푸렸겠지만 오늘 만큼은 그의 장난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매번 이런 생일이라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표정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미소를 참기 위해 입술에 힘을 주었지만 입꼬리가 한 쪽만 올라가는 것이 아무래도 실패인 모양이었다. 그는 피식 웃고는 다가와서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목덜미에는 언제나 옅은 햇살 향기가 배여있다. 매끄러운 살갗에 입술을 묻고 눈을 감았다. 앞으로도 제 옆에 있어주세요. 말할 때마다 아랫입술이 그의 목을 쓸었다. 물론이지. 그가 내 귓바퀴에 소리 내어 입을 맞추었다.
“애인 옆에 놔두고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그가 이불 속에서 심술 맞게 발을 구르자 가라앉아있던 먼지들이 공중에서 춤을 추었다. 나는 할 수 없이 그를 달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갔다. 그가 내 얼굴을 살피며 장난스럽게 입술을 내밀었다. 그 도톰한 입술을 잡기위해 몸을 가까이 하자 아까와는 조금 달라진 창가가 눈에 띄었다. 곰인형의 두 앞발이 서로 포개어져 있었다. 아니, 애도 아니고……. 그를 향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 반응! 이게 어때서! 민망한지 그가 매트리스를 몇 번 내리쳤다. 그래도 부끄러움이 풀리지 않았는지 갑자기 내 허리를 감싸 안고 그대로 끌어당겨 버렸다. 결국 나는 속절없이 그의 몸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입술에 버드키스를 퍼 부었다. 처음엔 맥락 없는 스킨십에 발버둥을 쳤지만 나도 곧 그의 볼을 감싸쥐었다. 음……. 조만간 매트리스 스프링이 망가질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