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김 시란 - 늦은 봄

-시라부.

"네,네, 네..."

-그동안 연락을 못했어. 미안하다.

"ㄱ.."

 

하마트면 괜찮아요, 괜찮아요! 선배는 잘 계셨어요? 하고 나갈뻔한 눈치없는 입을 찰싹찰싹 때렸다. 시라부는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지금 화가났다. 화가 난 상태다.

 

"바쁘셨어요?"

-그래.

 

다시 목이매였다.

누구는 아무리 쉼호흡을 해도 쿵쾅쿵쾅하고 쉴 새없이 심장이 뛰어 죽겠는데, 묘하게 침착한 목소리가 억울했다.

 

 

 

 

 

 

 

 

 

 

 

 

 

 

 

*

 

 

 

 

 

 

 

 

 

 

 

 

 

 

 

 

시라부는 손에들린 휴대폰만 눈이 터지도록 노려보다가 휙 하고 던져버리길 수 백번. 쉬는 시간만 쥐어지면 부리나케 휴대폰으로 손을뻗던 시라부가 기어코 홀드키를 꾸욱 눌러 전원을 꺼버렸다.

 

"너 오늘 왜 그래?"

"뭐가."

 

찌릿, 하고 째려본 시라부에게 두 손을 들어보인 카와니시가 잔뜩 겁먹은 부원들쪽으로 다가갔다. 오늘따라 짜증이 난 주장 덕분에 체육관 전체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어떻게 흘러 간 지도 모를 연습을 끝내고 체육관을 나올때가 되어서야 시라부는 찬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져지 주머니에 뚜렷하게 느껴지는 네모난 윤곽을 애써 무시하려다가 눈을 딱 감고 다시 꺼냈다. 한입베어물은 사과모양이 오늘따라 왜이렇게 긴지. 손바닥에 엎었다 말았다, 다시 엎었다 하는 시라부가 벛꽃이 흐드러지게 핀 배경을 뒤로하고 찍은 우시지마의 대학배구팀 사진이 뜨자마자 홈키를 눌렀다. 마음은 바빠죽겠는데. 금방씻고 나와서 쪼글쪼글 해진 손의 지문이 말을 듣지않았다.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나서야 보이는 전화기모양의 어플리케이션위에는 아무런 숫자가 떠있지않았다.

 

"아, 오늘도 전화가 없다 이거지?"

 

시라부는 당장이라도 전화하고 싶은 걸 꽉꽉 눌러 참고 언제쯤 전화가 오나, 애꿎은 배경화면에 늠름하게 나온 수많은 사내들 사이에 우시지마의 얼굴만 콕콕콕 두들켰다. 아무리 잘 생기셔도 소용없어요. 우시지마상이 이기나 제가이기나 어디 한번 해봅시다. 비장한 얼굴의 시라부는 까드득 이를 갈았다.

속에서 부터 싸하게 열이 훑고 올라왔다. 화르륵 불타는 서러움이 한데 모여 새빨간 분노가 되었다. 지금이라면 불도 내뿜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뜨거웠다.

 

 

 

 

 

흔히들 말하는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의 커플이 될 지는 상상도 못했다. 더구나 우시지마의 사랑은, 꽤 짙고도 강한거였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멀리떨어져있어도 걱정말라던 우시지마의 따뜻하고 큰 손의 감촉이 희미해져갈수록 발을 동동 거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저의 몫이었다. 매번 전화나 문자를 먼저하는것. 1교시에 보낸 문자에 2교시가, 3교시가되어도 여전히 읽지않음 표시가 되어있었던 것도. (오후나 되어서야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 통화를 해도 짧은 통화뿐. 무슨 선배가 부른다고 이따가 통화하자고 그러고. 어떤 교수님이부른다고, 이번엔 어떤 코치님이. 다 된건가 싶으면 과제 때문에 도서관이라고했다. 훌쩍훌쩍 지나가버린 우시지마의 시간들 속엔 시라부가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정말 '나빼고 다 봄'이었다. 한번 삐뚤게 쳐다보기 시작하니 죄다 맘에 들지않는 것들 투성이었다. 부루퉁,하게 입이 댓발나온 시라부의 입을 보고 놀리는 카와니시도, 굳이 왜그렇게 안색이 좋지않냐고 묻던 고시키도. 그 중에서도 제일 맘에 들지않는 건 그런 우시지마를 그래, 바쁠 수 도있지. 1학년 이시니까 얼마나 바쁘겠어. 하면서 시원하게 이해하지못하고 꽁, 하고서는 차곡차곡 담아두고 있는 자기 자신이었다. 그래도 속상했다. 딱히 당장에 다가올 내일이 자신의 생일 때문이 아니었다. 복합적인 이유였다. 나만 이렇게 기다리냐, 이제 나 안좋아하나. 눈물이 핑 하고 돌더니 이내 뚝뚝, 닭똥같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정말로, 진짜, 나만 좋아하나 싶어서.

 

아니 사실은 아주 많이 속상했다. 다른 날도 아니고 내일이 생일인데. 오늘 미리 생일 축하한다고 선물도 받았는데. 이 나쁜 우시지마상은, 그동안 전화도 없고 머리 한올도 안비치고 텐도선배한테는 배구신성의 학창시절 동료로 방송에 나와달라고 부탁까지 했다던데.

 

눈물을 훔치고 있는데 전화가 온거다. 제일 보고 싶어 죽겠는데 제일 보기 싫은 사람한테.

 

 

 

 

 

"바쁘셨어요?"

-그래.

 

 

'그래'라고?

 

 

"바쁘시면 평생 전화하지 말지 그러셨어요. 문자도 하지마시고."

-시라부.

 

 

지금껀 말이 너무 심했나. 그래도 화가나는걸 어떡해. 시라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얇은 입술아래의 피가 입 안으로 퍼져서 비릿한맛이 감돌았다. 우시지마는 수화기 저 편에서 시라부에게 할말이없는건지 아니면 할 말을 고르고 있는건지 아직도 시라부의 이름을 불러놓고서는 말이 없었다. 차라리 아무말이라도 하지.

 

 

"아무말이라도 해 보세요. 없으세요? 그럼 저부터 할까요? 저요. 저 사실 속 되게 좁아요. 매일매일 내가먼저 통화하고 문자하고, 그건 그렇다고 쳐요. 제가 우시지마상을 더 좋아하니까. 그런데 봐주지도 않는건요? 짧은 답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요. 그럴때마다 당연히 아닐거라고 생각하지만 우시지마상이-, 우시지마 상이 저말고 다른 사람이 생긴건아닌지,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아세요?"

-...그건, 내가 잘못했어.

 

 

꾹꾹 눌러참았던 억울함과 속상함이 펑, 하고 터지면서 눈물도 봇물처럼 흘러내렸다. 이렇게 된거 아예 다 해 버리자. 속상한거 훌훌털고 차일거 차이더라도 다 말해버리자.

 

 

"저, 위로 형 하나 있어서 대학신입생이 얼마나 바쁜진 아는데요, 그래도 우시지마상 한테 듣고싶어요. 오늘은 뭘했는지, 내일은 뭘할껀지. 왜냐면 나한테는 그렇게 시시콜콜한 것 까지 하나하나 다 궁금하니까요. 특히 저는 내일이 제일 궁금하네요. 제 생일날 뭘 하실지."

-...

 

 

그래, 이 정도면 됐다 싶을만큼, 속이 후련할만큼 우다다다 쏘아붙인 시라부가 후아,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제법 더워진 공기가 폐부를 뚫고 들어왔다. 빨개진 얼굴이 다시 원래 피부색으로 되돌아올시간동안, 반대편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않았다.

 

 

"네 말을 들으니 내가 심하긴했던 것 같군."

 

 

고장난건가? 어떤 소리도 들리지않아서 휴대폰을 손바닥에 탁탁 쳐보기도했지만 이상은 없는 걸 계속 귀에 대고있던 시라부는 등 바로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잔뜩 굳은 채 돌아봤다. 조금은 야윈듯한 얼굴이 금이 죽죽 그어져있는 휴대폰을 귀에 대고 그리웠던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쭉 오늘까지는, 망가진 걸 가지고 문자라도 보내려고 애를 썼었다. 그리고 내일은 생일, 축하해주려고."

 

 

 

 

 

 

 

 

 

 

 

 

 

 

 

 

 

 

 

 

 

 

 

 

 

 

 

 

 

 

늦은 봄이 찾아왔다. 나에게도.

 

 

-fin.

본 페이지는 편의상 존칭을 생략하였습니다. 

© 2017 by Shirabu_CB of Site. Proudly created with Wix.com

  • Facebook Social Icon
  • Twitter Social Icon
  • Google+ Social Icon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