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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샤인 - In Cam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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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에 절은 체육복을 갈아입는 부실 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가 돌았다. 이유는 당연하다. 우연한 스케줄의 겹침으로 내일은 감독님도 코치님도 안 계시니까. 그렇다면 조금 느슨하게 가도 되지 않을까, 암묵의 시선을 교환하는 이들 사이로 주장만 그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한 듯하다.

 

 

“와카토시 군~ 내일, 뭐 할 거야?”

“…?”

 

 

어떻게 하면 연습도 대충하면서 알찬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텐도의 장난어린 말투를 우시지마는 이해하지 못한 듯 했다. 상의를 갈아입고서 한참을 멍하게 쳐다보다가 로드워킹부터 시작하는 평소의 연습 코스를 그대로 줄줄 읊기 시작해서 세미랑 오히라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바랄 걸 바래야지.

 

 

“그, 그만…! 이제 충분하다고!”

“평소랑 똑같은데, 뭐가 말이지?”

 

 

아니야! 아니라고! 끙끙, 괴로워했지만 오히려 우시지마를 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진짜 꾀를 내서 쉴 녀석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 마른 웃음을 짓던 오히라는 사실 그들 뒤에 축 처져 쉬고 있는 고시키를 눈 여겨 보고 있었다.

 

이쯤 되면 고시키가 어떻게 연습을 거를 수 있냐며 치고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인데, 오늘따라 말 수가 적은 고시키는 한숨을 쉬는 건지, 크게 어깨가 들썩이는 것처럼 보였다. 컨디션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저러지.

 

 

“에엑! 너무한 걸! 그렇지만 와카토시 군! 곧 있을 내 생일 때는 좀 봐줄 거지?”

“… 네 생일은 예선 직전이지 않나.”

 

 

항상 자신감으로 쫙 펴져있던 어깨가 초라하게 떨궈진 모습이 걱정스러워 보여 오히라는 슬그머니 고시키의 뒤쪽으로 다가갔다.

 

 

“선배, 그럼 저 내일 쉬어도 되는 겁니까.”

 

 

움찔, 우시지마와 텐도의 대화에 별 반응이 없던 고시키의 등이 주전 세터의 말 한마디로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 반응에 오히라는 손을 거두고 다시 그들의 대화에 집중한다. 어느새 옷을 다 갈아입은 시라부가 한 마디 하자 텐도는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옷! 시라부, 내일 생일이던가? 그럼 내일 뭐해? 연습이죠. 너무해애! … 와 같은 대화는 다들 텐도에게 그쯤 해두라는 식으로 해서 싱겁게 끝나버렸다.

 

아무도 축 처진 1학년 에이스에 대한 생각은 없는 듯 했다.

 

딱 1명 빼고.

 

 

 

 

 

# Tape 01. Camera On

 

 

5월 4일, 시라부는 오전 내내 수업시간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그 녀석 생각 때문에.

 

자신의 실력에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에이스 자리를 노리는 1학년. 발전될 가능성이 보이는 건 사실이니까 실력 면에서 나무랄 점은 없었다. 선배들도 그렇게 보고 있었고, 은근 허당끼가 있는 모습을 귀여워(?)하는 선배도 있는 모양이니까. 하지만 시라부는… 그러질 못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 처음 생긴 자신감 충만한 후배를 애틋하게 감싸줄 능력이 없었다.

 

 

“저는 시라부 선배한테 인정받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녀석의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간지럽다고 해야 할까. 우시지마나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하고는 다르다는 걸 눈치 채자 마음이 더 이상해졌던 것이다. 확신은 없었다. 세미 선배나 카와니시에게 넌지시 물어봤을 때도 다들 모르는 눈치였으니까. 오히려 오히라 선배한테 물었을 때는,

 

 

“아하하, 그래도 은근히 너를 좋아하는 눈치야.”

 

 

그 대답에 넋이 나가기도 했다. 분명 그런 좋아함은 아닐 터였다.

 

가끔씩 저를 바라보는 시선과 눈이 마주칠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당황하며 고개를 돌리는 녀석을 보고 있으면 혹시 정말로 녀석이 그런 마음일까 봐 되려 더 퉁명스럽게 대한 건 사실이었다. 괜히 실수가 없는데 다그친 적도 있었다. 어제도 그랬다. 그래서 그렇게 힘없이 부실에 앉아있는 녀석을 일부러 모른 척 한 것을 아무도 몰라주길 바랬다.

 

‘복잡해’

 

녀석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을 때조차 생각나면 너무 당혹스러웠다. 최근 들어 더 자주 생각나서 그랬다. 그냥 아무 생각 말자 싶으면서도 저를 보는 고시키의 시선이 눈에 선했다.

탁탁. 마지막 수업을 마친 선생님께서 교실 문을 나서자 학생들은 저마다 짐을 싸기에 바빴다. 결국 오후 수업 때도 마찬가지로, 고시키 생각만 하며 보내버렸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시라부 역시 가방을 챙겨 매고 힘없이 교실 문을 열고 나왔다.

 

 

“켄지로!”

 

 

복도에 발을 내밀자마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당황해서 두리번거렸더니 금세 벽에 기대 있다가 달려오는 카와니시를 볼 수 있었다. 마치 시라부를 기다린 것만 같은 태도에 무슨 일인가 싶어 불안감이 앞섰다.

 

 

“무슨 일 있어?”

“아니, 뭐 별일은 아니고….”

 

 

눈동자를 굴리며 머뭇거리는 카와니시의 태도는 그런 불안감을 줄여주지 못했다.

 

 

“우시지마 선배가 시킨 일이 있는데, 나 갑자기 다른 할 일이 생겨서….”

 

 

당연히 지금 당장 연습용 보호대가 필요하다는 그의 첫말은 어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우시지마의 이름이 나오자 의심은 풀려버렸다. 우시지마의 이름을 들먹이며 꾀병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알았어.”

 

 

긍정의 말과 하는 끄덕임이 다소 뜻밖인 듯 더 당황하는 카와니시를 보는 것도 영 기분이 좋지 않아 미간을 찌푸린 시라부였지만, 녀석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물건은 바로 체육관에 가서 전해주면 된다고 말한 뒤 단숨에 시라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무슨 급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렴. 시라부는 기분전환 겸해서 천천히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최대한 빨리 해달라는 말도 없었으니까 가까운 곳 말고 조금 먼 곳에 다녀와도 괜찮겠지. 어차피 오늘은 부원들만 남아서 연습하니까… 조금 느긋하게 다녀와야겠어.

 

이 작은 행동으로 무언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을 그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 * *

 

 

근처에 새로 생긴 공원으로 인해 로드워킹 코스를 수정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대화가 오고갔다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그 공원을 이렇게 보게 될 줄은. 시라부는 새로 생긴 공원을 지나며 그런 생각을 해버렸다. 방과 후였지만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고 조용하다. 아마 바뀌면 이제부터 이쪽으로 갈 수도 있는 걸까. 혼자 부활동 생각을 하다가 또 다시 그 녀석이 떠올라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하지만 한적한 공원을 지나자마자 거짓말처럼 건너편 도로에 보이는 익숙한 뒤통수에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눈을 비비고 봐도 그 모습은 고시키가 분명했다.

 

‘어디 가는 거지?'

 

자기는 심부름, 카와니시는 피치 못할 급한 사정. 그렇다면 저 1학년은 뭐 때문에 정문 밖을 나선 걸까, 그것도 혼자. 그저 단순한 호기심이었을 뿐이었다. 조심히 길을 건너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뒤따라 걷기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설마 연습을 빠지려는 건… 아니겠지. 텐도라면 몰라도 고시키가 연습을 빼먹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저도 모르게 걱정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한 시라부의 짧은 미행은 고시키가 순간 갸우뚱거리며 고개를 돌림으로써 끝나버렸다.

 

 

“아….”

 

 

갑자기 마주친 둘 중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고시키는 무언가 들킨 것처럼 제대로 쳐다보질 못했고, 시라부는 미행하는 것처럼 보였을 거라는 생각에 창피한 마음이 서서히 스며드는 걸 느끼고 있었다. 옆 도로에서는 승용차들이 지나가는 소리만 짧게 들렸다.

 

 

“… 연습 빼먹고 어딜 가는 거야?”

“네? 아, 저… 저 그런 거 아닙니다! 우시지마 선배한테 얘기도 하고 나왔는걸요.”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 전에 시라부는 딱 잘라서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머뭇거리면서도 허락을 맡고 나왔다는 모습은 거짓말처럼 보이진 않았다. 근데 우시지마 선배라고? 시라부는 그 대답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우시지마 선배가 시킨 일이 있는데…’

 

차라리 허락을 맡았다면 오히려 고시키한테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카와니시나 고시키 중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시라부 생각에 카와니시는 둘째치더라도 지금의 안절부절 못하는 고시키의 모습이 훨씬 더 수상하다고 판단했다.

 

 

“왜? 무슨 일인데.”

“저는 그냥… 뭐….”

 

 

게다가 이유를 말해주지도 않는다. 시라부는 자기도 연습을 빼먹고 나왔다는 사실을 잊은 채 의심스런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조용히 올려다보는 시선에 고시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밀입니다, 그건.”

 

 

하지만 들려온 대답에 시라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허락을 맡았다면 괴상한 이유도 아닐 텐데. 거기에 평소 자신에게 대하는 싹싹하고 당당한 태도와는 조금 달랐던 탓이리라.

 

 

“너 그냥 연습 빼먹으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런 고시키의 모습에 시라부는 조금씩 퉁명스러워지는 자신의 태도를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시라부를 보며 더욱 불안해하면서도 기어코 끝까지 말을 하지 않는 고시키. 작은 실랑이를 벌이지만 이내 고시키는 입을 꾹 다문 채 시선을 피했다.

 

 

“시라부 선배랑은… 안 돼요.”

 

 

뭐야, 무슨 볼일인데 그렇게 딱 잘라 말하는 거야. 부글부글 거리던 속은 놀랍게도 그 한마디에 가라앉고, 제대로 속이 상해버린 시라부는 그 대답을 끝으로 결국 반대방향으로 몸을 틀어버렸다. 그래, 그럼 너 알아서 해. 나는 갈 거야. 딱 봐도 그렇게 말하고 있는 발걸음에 고시키는 망설이듯이 계속 시라부를 부르기에 급급했지만.

시라부가 한참 걷다 뒤돌아봤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 * *

 

 

바보같이 기대했다는 걸 깨달아서 일까. 그 순간 그렇게 기분이 더러울 수가 없어서 혼자 씩씩거리며 정문까지 돌아왔지만 이내 우시지마가 시킨 심부름마저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아야만 했다. 와중에 바보같이 그걸 잊어버리다니.

 

다시 한숨을 내쉬면서도 방금 전에 했던 고시키와의 대화가 생각나 괜히 싱숭생숭한 마음이 들었다. 얼마나 잘난 걸 하려고 그렇게 입을 꾹 다물고 비밀로 하는 걸까. 왜 나는 이리 단순한 걸로 짜증이 나는 걸까.

 

근처에 보이는 아무 가게로 들어가 물건을 구입한 뒤 시라부는 종이가방을 들고서 정문으로 향했다. 그럼에도 우울한 마음은 좀처럼 나아질 기세가 없었다. 더욱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하늘이 점점 흐려져 크게 쏟을 듯 했으니까. 그리고 곧 톡톡, 자꾸만 얼굴 위로 빗방울이 떨어져 시라부는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근처에 있는 교사로 가서 비를 피해야만 했다. 바로 체육관 가서 전해 달라 했는데… 그칠 때까지 일단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온 시라부는 제일 처음 보이는 계단으로 가 걸터앉았다.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쏟아지는 비를 보니 다시금 생각에 잠긴다.

 

‘시라부 선배랑은… 안 돼요’

 

그럼 다른 사람이랑은 된다는 거야?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지만 시라부는 화를 참으려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그렇지만 생각할수록 열 받아. 나는 오늘.

 

 

“…생일인데.”

 

 

굳이 사전에 미리 알리지도 않았고, 챙겨 달라 한 적도 없었지만 이렇게 아무에게도 축하받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공허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런 말까지 듣고. 이상한 심부름에 비까지 쏟아지고. 어쩌면 최악의 생일일지도.

 

한숨을 쉬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수업이 끝난 학교 건물은 조용했고,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만이 들려왔다. 우리 학교에 음악부가 있던가? 그런 단순한 생각과 함께 손바닥을 얼굴에서 떼어 냈을 때였다.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그를 다시 만난 건.

 

 

“…….”

 

 

눈이 마주치자 말 그대로 헐레벌떡 뛰어온 녀석은 문을 열기 무섭게 숨이 차올랐는지 헥헥 거리며 무릎에 손을 얹는 모습을 보였다. 그새 비를 피하지 못하고 계속 맞은 탓인지 한층 차분해진 머리카락에서 물이 똑똑 떨어졌다.

 

 

“하아. 선배… 한참… 찾았어요.”

“…뭐?”

 

 

나를? 왜?

멀뚱히 쳐다보는 시선을 보내기도 전에 가까이 다가온 녀석의 얼굴을 보자 더 당황스러웠다. 안에 입은 와이셔츠까지 다 젖은 듯 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진즉에 따라왔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해서 죄송하다고, 시라부는 그렇게 해석해야 했다. 왜냐하면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으려 올린 팔에 묻혀 발음이 다 뭉개지고 말았으니까.

 

우는 건가 싶을 만큼.

 

 

* * *

 

 

둘은 나란히 계단에 걸터앉아 쏟아지는 비를 마주보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통 진정되지 않는 모습에 시라부는 고시키가 입을 열 때까지 아무 말 않고 있어 주었는데, 어느덧 피아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제 좀 괜찮아?”

 

 

아까의 짜증남을 기억할 새도 없었다. 갑자기 온 힘을 다해 뛰어온 녀석에게 똑같이 퉁명스럽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시라부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걱정되는 마음에 평소답지 않은 나긋나긋한 말투라는 걸 인식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아… 네, 죄송해요.”

 

 

딱히 아까는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제 와서 찾아온 이유가 뭔지 추궁하고픈 마음은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고시키의 곁에 나란히 앉아만 있었다.

 

고시키가 활짝 열고 들어온 문으로 줄곧 쏟아지는 비만 바라보고 있자니 방금 전의 일이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만큼 아득하게 느껴졌다.

 

 

“사실은….”

 

 

얼마나 지났을까, 고시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한쪽 무릎을 세워 안고 있는 모습은 어딘가 애 같기도 했고, 그답기도 했다.

 

 

“… 사러 갔었어요.”

“응?”

 

 

망설이는 듯, 웅얼거리는 말투에 다시 되물었다. 마주보고 하는 대화는 아니었기에, 자연스레 시라부는 자신의 오른쪽에 앉아있는 고시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머뭇거리며 입술을 움직이는 녀석의 눈은 바닥만 향한 채 힘이 없었다.

 

 

“… 선배 생일 선물이요.”

 

 

아, 그제야 그가 우물쭈물 말도 못하면서 고집을 부렸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분명 저를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가 그렇게 생일 선물을 사러 갔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하다니. 확실히 고시키라면… 태연하게 그 상황을 빠져나가는 것도 무리였겠지.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시라부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려해서 급한 마음에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그제야 아직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무렇지 않은 척 반응해야 하는데….

 

 

“… 그래서 샀어?”

“그게… 못 샀어요.”

“뭐?”

“선배가 그렇게 가버리시니까… 왠지 따라가야 할 것 같아서… 따라 갔는데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겠는데… 그, 날도 흐리고 비도 오니까 걱정돼서요.”

 

 

시라부가 정문까지 왔다가 뒤늦게 심부름을 깨닫고 돌아갔던 탓이리라. 아마 그새 엇갈리고 엇갈려 고시키는 비가 오는데도 한참동안 시라부를 찾았던 거겠지. 그제야 몰려오는 민망함에 시라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휙 가버린 제가 걱정돼서 선물을 사려다 돌아온 후배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하는 걸까.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해야하는 걸까. 애석하게도 시라부는 그런 거에 자신이 없었다.

 

 

“… 그럼 이제 어떡할 거야.”

“네?”

“내 생일 얼마 안 남았다고. 설마 내년에 주려는 건 아니겠지?”

 

 

평소의 쌀쌀맞은 태도로 돌아온 시라부를 보며 고시키는 당황했는지 다시금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지, 지금 당장 사오겠습니다!”

“됐어.”

 

 

시라부는 고시키가 뭘 사오려 했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딱 잘라 말한 거였다. 하지만 고시키에게는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무조건 사와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벌떡 일어나려 하기에, 당황한 시라부가 고시키의 팔목을 붙잡는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어버렸다. 휴, 한숨을 내쉬며 그 손을 짚고서 시라부도 몸을 일으켰다.

 

 

“그냥 몸으로 때워, 너 나 좋아하잖아.”

“…….”

 

 

아, 실수했다.

 

시라부가 한 말은 단순했다. 진심 반, 장난 반. 어차피 너 나 좋아하니까 앞으로 시킬 일 있으면 시킬 테니 몸으로 때우라는, 아무런 뜻 없이 담긴 말이었는데 당황해서 점점 얼굴을 붉히는 고시키를 보자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일단 부실로 가자. 어차피 안 그칠 거 같아. 그리고 너 옷도 좀 갈아입고.”

 

 

붉어진 얼굴을 나 몰라라 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내려놓은 짐들을 주섬주섬 챙기고 한 번 쓰윽 뒤돌아 훑어봤다. 고시키는 여전히 반응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그냥 가방이라도 머리 위에 올리고서 뛰어갈 생각이었는데 금방 뒤따라 나온 고시키는 어차피 젖은 자신의 마이를 우산삼아 가자고 했다. 그래서 ‘그럼 그렇게 하자’ 라고 대답은 했지만 생각보다 가까이 붙어야 해서 되려 민망해졌다.

 

‘빨리, 빨리 가자’

 

속으로만 걸음을 재촉했다. 고시키가 양손으로 들어 올린 마이 밑으로 들어가는 게 생각보다 밀착해야 한다는 걸 깨닫지 못한 몇 분전의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혹여나 비에 맞을까봐 시라부 쪽으로 팔을 기우는 고시키의 배려를 애써 무시한 채 부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할 때까지도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아직 얼굴에 붉은 기가 남아있는 고시키가 마이를 탈탈 털어낼 때 시라부는 재빨리 계단을 올랐다. 아, 그렇지만 부실에 들어가면 또 단 둘이잖아. 그럴 바에는 그냥 빨리 옷을 갈아입고 체육관으로 향해야겠다. 로드워킹은 끝나고 남을 시간이었고, 어쩌면 비가 온다는 걸 알고서 그냥 연습중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계단을 올라 부실 가까이 가자 느껴지는 소란스런 기척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흐릿한 작은 창 너머로 불이 켜져 있는 것도 볼 수 있었기 때문인데 당연히 이 시간에 부실에 누군가 있어서는 안 되었다.

 

- 달칵,

 

적어도 5명 이상의 소란스러움이 느껴지던 부실 안은 시라부가 문을 여는 순간 조용해졌다. 보면 안 될 거라도 보게 될 것 같은 감각이었지만 살며시 문을 열어보니 안에는 텐도와 카와니시, 세미 등등… 심지어 우시지마까지 있었는데 그의 앞에는 온전한 생크림 케이크가 초만 꽂아놓은 채 준비되어 있었다.

 

 

“이게 무슨….”

“서, 서프라이즈-?”

 

 

텐도 역시 갑자기 들이닥친 시라부가 당황스러운지 입꼬리를 떨며 대답을 했지만, 시라부는 혼자 이해하지 못한 채 눈만 꿈벅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 중에서도 카와니시랑 눈이 마주치자 멋쩍게 웃는 녀석을 보며 아, 설마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 Break Time

 

 

부랴부랴 준비한 생일 초를 끄자마자 세미와 텐도는 시라부의 얼굴에 크림을 묻히기 바빴다. 와중에 카와니시는 제 생일 때는 안 이랬으면서… 라고 투덜대면서도 어디서 챙겨왔는지 고깔모자랑 이상한 모양의 안경을 시라부에게 씌우고선 휴대폰으로 더 찍지 못해 징징거렸다.

 

하지 말라고, 오늘 일어난 일들이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아 얼굴을 굳힌 채 짜증을 내던 시라부는 갑자기 내밀어진 종이봉투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우시지마가 내민 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우시지마가 텐도 말대로 연습을 하지 않고 이런 작은 파티에 가담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종이봉투를 열어보자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작은 토끼 인형 모양의 휴대폰 고리. 도저히 우시지마가 사왔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비주얼. 보지는 못했지만 다른 이들도 놀랐을 게 분명하다.

 

 

“아… 감사합니다.”

 

 

우시지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별 말이 없었다. 게다가 그 뒤로 다른 할 일이 있는지 먼저 가보겠다며 부실 밖으로 나가버려서 선물에 대해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가 나가자마자 부실 안은 긴장이 풀린 숨소리가 가득 차버렸다. 쳐다보니 텐도마저 가슴을 쓸어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는 통에 시라부는 그저 일회용 젓가락으로 케이크를 한 입 먹으며 옆에 있는 카와니시를 콕콕 찔렀다.

 

 

“설마 아까 그 심부름, 이거 하려고 한 거야?”

“어? 음… 그렇긴 한데….”

 

 

카와니시의 표정도 썩 좋지는 못했다. 서프라이즈라며, 시라부를 골탕 먹이려 속였으면서 비밀을 밝혀 후련한 표정이 결코 되지 못했던 것이다. 다른 이들의 표정도 마찬가지였지만 분위기는 곧 다시 활발해져서 시라부는 가만히 있었다. 찝찝한 마음이기는 하나 시라부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물어보다가 왜 이렇게 늦게 왔는지도 궁금해 하면 대답하기 좀 곤란하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우시지마가 떠난 뒤 간간히 들어왔다 나가는 1학년 부원들이 행동이 이상해서 시라부는 물어볼가 말까를 한참 망설여야 했다. 부실 안에 있는 시라부를 보자마자 눈치를 보면서도 그저 생일 축하한다는 인사만 건네는 후배들은 어떤 힘든 일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힘이 쭈욱 빠져보였으니.

 

별 일 아니겠지 싶은 마음에 부원들이 썼다는 롤링페이퍼를 훑어보던 시라부는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뒤늦게 부실로 들어온 걸 아까 본 것 같은데, 언제 가버린 건지 고시키는 사라지고 없었다.

 

 

* * *

 

 

생각보다 늦어진 시간에 다들 간단히 정리를 마치고 부실을 나섰다. 어느새 비는 그쳐있었고 중간 중간 작은 웅덩이만 생겨 그 흔적만 드러낼 뿐이다. 부실을 나가면서 시라부는 우시지마가 건네준 종이가방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근데 왜 토끼인거지.

 

‘저야 좋죠, 토끼 귀엽잖아요.’

 

그 순간, 갑자기 떠오른 기억의 조각 때문에 시라부는 저도 모르게 움직이던 발을 멈추고 말았다. 그저 우연의 일치인 걸까. 아니면….

 

‘우시지마 선배한테 얘기도 하고 나왔는걸요’

 

머릿속의 퍼즐이 맞물려가는 느낌이, 그렇게 안타깝고 답답한 적은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가볍게 끝날 하루가 아닐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 저 뭐 놓고 온 거 같아요.”

 

 

시라부가 그렇게 말한 건 부실이 있는 건물을 나섰을 때였다. 시라부가 먼저들 가라고 고개를 숙인 뒤 사라지자 대충 손 인사를 날리던 무리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시라부한테 말할 걸 그랬나?”

“하… 그렇지만 말할 것도 없었는걸요. 타이밍도 안 맞았고. 저희들끼리도 얘기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세미의 의문에 고개를 젓던 카와니시는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조용히 주위를 살피던 그들은 발걸음을 늦추고 서로 회상에 잠겼다.

 

시라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계획은 결코 이런 결말이 아니었다.

 

 

 

 

 

# Tape. 02 - Setting

 

 

“서프라이즈 파티지!”

 

 

5월 3일 저녁. 다들 돌아가고 텐도와 세미, 오히라, 카와니시만 남은 부실 안에서 텐도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감독도 코치도 없을 지금이 딱이라고. 이런 거하면 미라클 보이가 빠질 수 없지! 그렇게 생각해 낸게 부실에서의 서프라이즈 파티.

 

 

“그럼 우리도 준비를 해야 할 거 아니야. 방과 후에 시라부도 바로 올 텐데.”

“그건 간단하지! 시라부만 늦게 오면 되는 거 아니야, 그치 타이치?”

“… 네?”

 

 

목표1. 방과 후 시라부를 다른 곳으로 유인하라.

미안한데 방과 후에 이것 좀 해주면 안 될까? 작전

 

 

“… 그 녀석이 좋다고 하겠네요. 욕만 먹을걸요.”

“훗, 그럼 이렇게 해!”

 

 

변경 → 미안한데 방과 후에 이것 좀 해주면 안 될까?

우시지마 선배 부탁인데…

 

 

과연… 우시지마의 부탁이라면 일단은 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카와니시는 당황하면서도 묘한 설득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거라면… 뭐….”

“스포츠 용품점에 가서 적당한 거 사오라고 해! 알았지?”

“음… 네….”

“그렇지만 그러면 금방 오지 않을까, 더더욱 우시지마의 부탁이라면.”

 

 

세미의 지적은 일리가 있었다. 맘만 먹으면 제일 가까운 곳에 들러서 10분 컷을 찍을 게 분명하니까.

 

 

“그럼 여기서 두 번째 작전이군.”

 

 

목표2. 시라부의 시간을 끌어라.

체육관 정리할 사람이 아무도 없네~ 작전

 

 

“시라부한테 물품을 사면 바로 체육관으로 오라고 하는 거야.”

“흠, 부실이 아니라?”

“그렇지! 근데 체육관에는 아무도 없을뿐더러… 매우 매우 정리가 필요한 상태인거지. 예를 들어 모든 배구공이 체육관 바닥에 떨궈져 있는 그런 상태!”

“… 시라부 엄청 짜증낼 것 같은데….”

 

 

상상한 것만으로도 엄청 나게 짜증난 표정이 훤한 세미였지만 오히려 텐도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시라부도 그쯤 되면 생각할거야.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이미 다들 로드워킹하러 가버렸고… 곧 오겠지? 그럼 그전에 연습할 수 있도록 치워놔야겠지?”

“오…?”

 

 

텐도 주제에 꽤 비상하게 돌아간 머리를 칭찬하는 소리였다. 과연, 확실히 시라부는 그렇게 어지럽혀진 체육관을 보고 그냥 가버릴 녀석이 아니긴 했다.

 

 

“혼자 정리를 하고서 그제야 옷을 갈아입으러 부실로 돌아오면 우리가 기다리고 있다가 케이크와 선물 같은 것들로 서프라이즈! 하는 거지.”

“텐도 선배… 생각보다 머리 좋으신데요?”

“후후, 타이치. 그럼 너가 내일 수업 끝나고 케이크 사오기!”

“…에?! 아, 잠시 만요. 저 이제 가봐야 하는데.”

 

 

부실의 시계를 보던 카와니시가 놀란 듯, 텐도와 시계를 번갈아 보다가 결국 한숨을 쉬며 일단 알았다고 한 뒤 부실 문을 나섰다. 텐도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지 이름 모를 곡을 흥얼거렸다.

 

 

“그럼 와카토시는?”

“…….”

 

 

하지만 카와니시가 부실을 나간 후, 곰곰이 그들의 말을 듣기만 하던 오히라의 물음에 순간 다들 침묵을 유지하고 말았다. 텐도는 고민하는 듯 했지만 단호히 고개를 저을 뿐이다.

 

 

“아냐, 이번 파티는 와카토시군의 정서와는 맞지 않아.”

‘그걸 인지하면서 하는 거냐….’

“그렇다면 이 방법이지!”

 

 

세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텐도는 세 번째 목표를 외쳤다.

 

 

목표3. 이 모든 것은 우시지마가 로드워킹할 때 이루어져야 한다.

로드워킹 코스 변경 작전.

 

 

“설마 지난번에 얘기 나왔던 그거?”

 

 

최근, 원래 이용하던 코스 주변에 커다란 공원이 생기면서 코스 변경 얘기가 나온 적이 있었는데, 텐도는 그 발상을 역으로 이용했다.

 

 

“원래 후보로 나왔던 A코스랑 B코스 모두 돌고 오면 시간이 꽤 걸릴 걸?”

“설마 우시지마 혼자 다녀오게 하자는 거야?”

“어차피~ 같이 가도 먼저 앞설게 뻔해!”

 

 

고개를 살랑살랑 저으면서도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내일 점심시간에 우시지마한테 넌지시 일러주기! 그러면 우시지마가 로드워킹 할 동안 시라부는 아무것도 모른 채 고생을 하고. 부실에서 짧게 파티를 한 다음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습에 돌입! 그러면 모든 게 완벽해! 시간을 확보했으니, 부실을 가볍게 꾸미거나, 롤링페이퍼도 하면 좋겠다. 카와니시한테 꼭 생크림케이크로 사오라고 하자 등등, 시라부를 골탕 먹일 생각에 들뜬 텐도와 세미였다. 남은 부원들한테는 내일 부실에 모였을 때 얘기하자고!

 

그 와중에 오히라는 뭔가 불안한 예감이 앞섰지만, 아무렴. 감독도 코치도 없고 설령 우시지마한테 들켜도 그렇게 화를 낼 녀석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 괜찮겠지, 하며 넘어가 버렸던 것이다.

 

 

* * *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시지마는 시라부의 생일 선물을 사서 부실에 도착하게 된다. 이 계획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단 말인가. 5월 3일 저녁에 있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텐도는 오늘 점심시간에 있던 일부터 차근히 짚어보기로 했다.

 

 

 

 

 

# Tape. 03 – Review

 

 

#5월 4일, 점심시간

 

“와카토시 군~”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건네는 텐도를 세미와 오히라가 불안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그들 눈에는 평소보다 2~3배 가까이 텐션이 올라간 게 뻔히 보였으니까.

 

한 테이블에 서로 마주 앉은 네 사람은 마치 어제 혹은 엊그제의 점심시간처럼 별다른 주제 없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텐도는 배구부 얘기가 나올 때 쯤 슬슬 본론을 꺼내들었다. 로드워킹 코스 변경 건. 차라리 감독님 없을 때 우리끼리 먼저 사전조사를 해보는 게 어떨까 싶은, 터무니없는 얘기였지만 우시지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 그럼 이렇게 하지.”

 

 

텐도의 얘기를 전부 들은 우시지마는 조곤조곤 자신의 생각을 내비쳤다. 오늘같이 시간이 남을 때, 두 코스 모두 조사해 보는 건 좋은 생각이지만, 부원들 체력을 생각하면 무리라는 것. 그 말에 세미는 침을 꿀꺽 삼켰고, 텐도는 ‘음, 뭐 역시 그렇지?’ 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시지마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건 나 혼자 하겠다.”

“응?! 와카토시 군 혼자?”

“평소보다 일찍 출발한다면….”

 

 

우시지마의 말은 자기 혼자 일찍 출발해서 두 코스 모두 돌고 올 테니, 남은 부원들은 원래 시간에 출발해서 조금 더 긴 코스A만 돌고 만나는 것. 그럼 얼추 시간이 맞지 않겠냐는 거였다. 그 뒤에 코스에 대한 서로의 의견도 교환해보고. 본인의 체력이 그 정도는 뒷받침 된다는 걸 알고 있다는 투였지만 자랑하는 것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학교에서 더 가까운 길은 코스A. 그렇다면 우시지마가 A다음 B를 갈 테니까 부원들하고 도중에 만나지 않고… 텐도는 재빠르게 머릿속에 지도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남은 부원들한테는 있다가 내가 설명하지.”

 

 

잠자코 얘기를 듣고 있던 오히라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 * *

 

 

“그럼 진작 말씀해주셨어야죠!”

 

 

텐도의 얘기를 듣던 카와니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애초에 카와니시는 목표2까지만 전해 듣고 갔던 터라 그 뒤의 일은 알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멀뚱히 텐도의 얘기에 몇 마디 더하던 세미는 그제야 깨달은 듯 탄식하는 소리를 흘렸다.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럼 넌 왜 우시지마랑 같이 왔던 거야?”

 

 

그들은 아직도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로드워킹을 한창 하고 있어야 할 우시지마는 카와니시와 함께 부실로 돌아왔었으니까.

 

 

“…아니 그게….”

 

 

카와니시는 한숨을 내쉬며 방과 후, 시라부에게 심부름을 시킨 다음에 일어난 일을 전했다.

 

 

# 방과 후

 

당황스러워 보이던 시라부가 부탁을 받아들여 속으로 쾌재를 부른 카와니시는 그 뒤 잽싸게 학교 건물을 빠져나왔고 최대한 시라부와 마주치지 않을 노선을 머릿속에 그려 넣으며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어긋나기 시작한 건 새로 생긴 공원을 지났을 무렵이었다. 천천히 걸어가는 시라부의 그림자를 보고선 다급하게 공원 안쪽에 숨기에 급급했는데, 당연히 카와니시의 예상 속에선 시라부를 이곳에서 만나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왜 저 쪽으로 가는 거지?’

 

분명 그 앞 사거리에서도 가게들이 줄 세워져 있는데. 애초에 카와니시는 앞서가는 고시키를 못 봤던 탓이리라. 시라부가 되도록 천천히 가려고 다짐했고, 그 후에 누군가 쫓아가고 있을 거란 생각을 못한 채, 한참 뒤에야 공원 안쪽에서 나온 카와니시는 금방 또 지나가는 익숙한 모습에 이번엔 숨지 못했다. 숨어서는 안 되었다. 지금 당장 시라부랑 제일 만나면 안 되는 사람.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지나갔던 것이다.

 

말했듯이 카와니시는 작전을 짤 때 일찍 나와 버린 탓에 우시지마에 대한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코스 변경도 당연히 알 리가 없었다. 왜 지금 그가 그 길로 뛰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는 혹시라도 지금 시라부랑 마주치는 것만은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시라부는 지금 우시지마가 시켜서 나간 걸로 되어있단 말이야.

 

그래서 카와니시는 헐레벌떡 뛰어가 겨우 우시지마를 붙잡고 말았다. 다행일지 우시지마는 시라부를 보지 못한 듯 했지만 카와니시가 왜 나와 있는지 의문이었을 거다.

 

 

“에… 저, 저는….”

 

 

그제야 변명거리가 딱히 없다는 걸 깨달은 카와니시였다. 어영부영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 수 있었겠지만 차마 우시지마한테 거짓말을 할 만큼의 경험치는 부족한 듯 했다.

 

 

“케이크를… 사러….”

“케이크…?”

 

 

하지만 생각보다 화를 내거나 표정을 굳히기는커녕,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카와니시는 긴장을 풀어버렸다. 아, 선배도 어느 정도 알고 계셨구나, 괜히 혼자 쫄았네.

 

 

“그럼 같이 가지.”

 

 

하지만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한참을 베이커리까지 나란히 걷다가 문득 뭐지, 아무것도 모르는 거 아냐? 싶은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하지만 이상함을 감지하기엔 너무 늦었다. 그렇다고 해서 차마 물어보지도 못하고… 끙끙거리던 카와니시는 우시지마가 갑자기 멈추자 몇 걸음 앞서 걷다가 후다닥 따라 멈춰버렸다.

 

여자 아이들이나 갈법한 팬시 물품 가게였다. 왜 이런데서 멈추지 싶었는데 가게 앞에 진열된 동물 모양의 휴대폰 고리를 유심히 지켜보던 우시지마는 이내 하나를 꺼내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카와니시는 얼결에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이윽고 가게주인하고 하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궁금증이 배가 되었다.

 

혹시 이런 사람 오지 않았습니까, 하는 질문에 대한 인상착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고시키를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 고시키가 이곳에? 왜? 고시키도 무슨 맡은 역할이 있었던 거야?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당연히 질문을 던질 수 없었다.

 

그 토끼인형의 휴대폰 고리를 사고서 돌아가는 길에도 끝까지.

 

 

* * *

 

 

“고시키?”

 

 

갑자기 등장한 이름에 다들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고시키를 제대로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 했다. 시라부가 들어온 뒤로 금방 들어온 것도 같았는데… 언제 나갔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으니.

 

 

“아무튼, 우시지마가 뭐 물어볼까봐 엄청 초조했지.”

 

 

그래서 화제는 다시 우시지마로 돌아갔다.

우시지마가 들어온 뒤 부실은 침묵 그 자체였다. 자기만 빼놓고 하려 했다는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했지만, 이렇게 다들 연습을 빼고 모여 서프라이즈를 준비하는걸 보고 있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무서웠달까. 더군다나 내일 연습을 위해 체육관 청소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졌을 때 다들 아차 싶었을 것이었다. 특히 텐도는 더욱 더.

 

목표2. 시라부의 시간을 끌기 위해 배구공을 버켓(bucket)안에서 전부 빼서 바닥에 쏟아 붓는 역할은 텐도가 맡았다. 하지만 텐도는 그에 성이 차지 않아 농구부가 쓰지 않는 여분의 농구공까지 전부 흩뜨려놓고 나서야 만족을 했던 건데… 지금 체육관에 가면 그 광경일 거란 말이다. 하물며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는 시라부 때문에 분명 그들은 시라부가 혼자 체육관을 정리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시라부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비를 피하고 있었지만)

 

그럼 1학년을 보내서 간단하게 청소만 시키자고, 다행히 누군가 좋은 의견을 내준 턱에 우시지마는 또 그대로 부실 안에서 가만히 기다리기만 했던 것이니… 아마 1학년 애들은 보았겠지, 그 광경을. 그리고 부실에서 얌전히 앉아있는 시라부를 보며 아니 왜 저기 앉아계시는 거지? 하고 의문을 품었겠지만 물어보지 못하는 모습을 텐도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모든 작전이 실패했네.”

 

 

옆에서 오히라가 웃으며 찬물을 끼얹는 통에 텐도는 자신의 생각을 들킬세라 움찔, 당황하면서도 연습을 안 하는 큰 그림을 완성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고 했다.

 

뒤에서 그 광경을 보던 카와니시는 피식-하고 웃었지만 차마 뒤늦게 깨달은 궁금증을 내비치지 못했다.

 

그럼 시라부는 어디 있었던 거지?

 

시라부의 행동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걸 깨달으면서 나온 의문이었다. 카와니시가 낮에 본 사람은 시라부가 틀림없었고, 아무리 멀리 갔다 한들 적어도 비가 오기 전에 바로 물건을 사서 체육관에는 도착을 할 수 있었을 텐데, 1학년 애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았으니. 게다가 시라부가 부실에서 가방을 열은 적이 없어 놔두고 올 물건이 있을 리 없다는 것조차 카와니시는 눈치를 채고 있었다.

하지만 긴 하루였다며 저마다의 감상을 늘어놓는 선배들 사이로 차마 또 다른 의문점을 남겨두기엔 타이밍이 맞지 않아 그저 조용히 뒤따라 걸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5월 4일은 저물어 갔다.

 

 

 

 

 

# Tape 04. Off The Record

 

 

# 5월 4일, 오전

 

이동 수업 시간, 고시키는 멍하니 다른 교실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이제 곧 있으면 점심시간, 수업 몇 개만 더 하면 부활동, 그럼 오늘 생일인 시라부 선배와 만나겠지….

 

언제부터 그런 마음이었는지는 모른다. 그저 지금은 시라부의 생일을 어떻게 챙겨줘야 이쁨 받을 수 있을까를 계속 생각할 뿐. 시라부한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으니 확신을 갖지 못해 애가 타던 참이었다.

 

이유는 뻔했다. 언젠가 부원들끼리 나눴던 대화에서 가져온 아이디어일 뿐이니까.

 

 

“고시키는 강아지 같아.”

 

 

대뜸 텐도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강아지? 좋은 의미인가요?! 음, 좋다고 할 수도 안 좋다고 할 수도…. 같은 대화였다. 얘는 어떤 동물, 걔는 어떤 동물 그런 별 볼일 없는 대화였기 때문에 고시키도 나중에는 흘려서 듣고만 있었다.

 

 

“시라부는 토끼 같지 않아?”

 

 

옆에 서서 땀을 닦으며 음료를 마시던 시라부를 보고 텐도는 그렇게 말했다. 의외로 시라부는 싫지 않았던 모양인지, 뜻밖이라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야 좋죠, 토끼 귀엽잖아요.”

“… 순진하게 생겼는데 속은 안 그럴 것 같단 말이지, 토끼는.”

“… 지금 욕하시는 거죠?”

 

 

속닥속닥. 고시키의 귀에 대고 말하는 걸 다 들린다는 식으로 쳐다보던 시라부는 동그란 눈으로 째릿 흘기다가 고시키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고시키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그런 단편적인 기억들이 하나 둘 씩 생기고 있었다. 전부 시라부에 관한 거였다. 머릿속에 가득차자 이번엔 눈으로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의식적인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없어서 이내 고개를 돌리곤 했었다.

그 뒤로는 반대의 경우도 많아졌다.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시라부는 당황한 듯 고개를 돌리거나, 아무 일도 없는데 째려보거나, 짧은 마주침은 무시한다던가 하는 그런 것들.

 

…혹시 눈치 챘을까.

 

그럼에도 고시키는 시라부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었고, 실제로 생일이라는 것도 어제의 대화를 통해 안 것이었다. 뒤늦게 무엇을 좋아할까, 고민하던 그에게 생각난 건 그 기억이 전부였지만 당일에 와서 무언가 사러나갈 핑계가 없다는 현실은 비참하기만 했다.

 

다른 친구들과 떨어져 우울하게,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가던 고시키는 결국 누군가와 부딪히게 되었다. 죄송합니…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건지. 급하게 사과를 하려고 올려다봤더니 체육복을 입은 우시지마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아, 우시지마 선배….”

 

 

갑자기 이루어진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의 표정에 한층 날이 서 있어 왠지 자신의 생각을 들킨 것 같아 괜히 움찔하게 된 고시키였다.

 

 

“어디 아픈 건가?”

“네?”

“안색이 안 좋은데.”

 

 

걱정거리가 한 아름인 얼굴이 안 좋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사실대로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고시키는 그런 거 아니라며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하지만 우시지마는 오히려 아프면 병원에 가야한다고 타일렀다.

 

병원.

순간 이건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럼 방과 후에 잠시 다녀와도 괜찮을까요?”

 

 

고시키는 거짓말에 강한 타입이 결코 아니다. 긴장한 탓에 목소리마저 떨렸지만, 다행히 우시지마는 전혀 눈치를 못 챈 모양인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던 고시키는 이어온 우시지마의 질문에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혹시 시라부가 뭘 좋아하는지 알고 있나?”

“네, 네… 네?”

“오늘 생일이잖아.”

“그야, 그렇긴… 한데… 말이죠…!”

 

 

대놓고 시라부 얘기에 말을 더듬는 고시키를 보면서도 아파서 그런가보다 라고 생각했을 우시지마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우시지마의 그런 속을 알 리 없는 고시키는 결국 더듬거리며 토끼 얘기까지 다 해버렸다. 굳이 그런 얘기 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고시키는 구구절절 거기까지 말해버렸다는 걸, 입을 다문 다음에서야 알게 되었다.

 

 

* * *

 

 

아마 우시지마는 고시키의 얘기를 듣고 ‘시라부는 토끼를 좋아하는 군’ 딱 그 정도만 생각해두었을 거였다. 그리고 단순히 카와니시를 만났을 때, 케이크를 사러간다고 하니 자기도 무언가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었을 거고. 지나가다 우연히 작은 토끼 인형을 보게 된거고. 가게에서 고시키에 대해 물어봤던 건 행여나 선물이 겹칠까 하는 염려에서 나왔다는 것도 아마 아무도 모를 이야기였다.

 

더욱이 우시지마가 카와니시를 만났다는 거 자체를 아예 알지 못하는 고시키로서는 그가 온전히 시라부만 생각하며 선물을 준비했을 거라는 게 거의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다.

 

‘분해’

 

분하다. 내 아이디어였는데… 심지어 자신은 사지도 못했다. 차마 시라부한테도 병원 간다는 거짓말은 할 수가 없어서 우물쭈물하다가 심한 소리나 해버리고. 휙 가버린 시라부를 모른 척한 채 선물을 사러갈 수도 없었고. 한참을 그 자리에서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뒤늦게 쫓아갔지만 홀딱 다 젖고, 빨리 찾지도 못하고, 속상해서 힘들어하는 모습만 보이고…

 

‘너 나 좋아하잖아’

 

그런… 그런 소리마저 들어버렸다.

역시 눈치 챘던 걸까.

 

 

하지만 그럼에도 시라부의 태도는 어느 정도 선을 그어 놓는 모습이 훤했다. 우산이 없어 옷으로 비를 가려주는데도 괜히 고시키와 멀찍이 떨어지려 한 걸 보면. 그리고 일찍이 고시키를 기다리지 않고 부실로 들어가 버린 걸 보면 안타깝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라부를 뒤따라 부실로 들어갔을 때, 고시키는 그 상황자체를 아예 눈치 채지 못했다. 당사자도 아니었고, 서프라이즈를 준비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우시지마와는 다른 애매한 제3자였을 뿐이었다. 다들 시라부의 생일을 축하하느라 여념이 없어서 다가가는 것도 쉽지가 않아 구석에서 혼자 옷만 갈아입고서는 내내 시라부가 혼자가 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다. 그래도 아까 심한 말 한 거 아직 사과조차 하지 못했고, 조금 더 대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우시지마가 토끼 모양의 무언가를 선물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던 고시키는 참을 수 없는 마음에 결국 우시지마의 뒤를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우시지마 선배!”

“…?”

 

 

그때도 비는 이미 그쳐있었다. 그저 어두워지기 시작한 날씨에 근처에 있는 가로등의 불만 환하게 밝혀져 있을 뿐. 부실을 나와 계단을 내려가는 우시지마를 불러 세운 고시키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며 소리쳤다.

 

 

“다음엔 지지 않을 겁니다!”

 

 

고시키는 나름 분하고 비장한 마음을 담아 날린 발언이었지만, 평소와 같이 배구와 관련된 말 일거라는 생각에 우시지마가 여느 때처럼 고개를 끄덕이기만 한 것을 고시키는 아마 졸업할 때까지도 모를 것이었다.

 

우시지마의 마지막 끄덕임을 제대로 오해해버린 고시키는 답답한 마음이 진정되질 않아 결국 부실로 다시 들어가지 못했다. 계단을 내려가 건물 외벽에 주저앉으면서 조금 더 세게 말했어야 했나, 절대지지 않을 겁니다! 라던가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겁니다! 라던가, 하며 끙끙거렸다.

 

이를 갈며 분노를 삭이던 고시키는 아마 그 때문에 다들 부실을 나가 떠나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그리고 고시키가 절대 먼저 돌아가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에 시라부가 이쪽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고시키는 저 멀리에서 시라부가 다가오는 발소리에도 놀라지 않고 고개만 들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거기서 뭐하고 있냐는 물음에도 아까처럼 제대로 대답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게 입을 움직여 대답하고 있었다.

 

 

“… 기다리고 있었어요.”

 

 

떨리지도 않았다. 분한 마음과 들뜬 마음으로 몸은 마치 워밍업을 마친 상태처럼 적당한 기합만이 남아있었고, 오히려 아까의 외침으로 홀가분해진 상태였다.

 

 

“… 그래.”

 

나도, 너한테 할 말 있어.

 

낮은 목소리로 이어가는 말을 듣던 고시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엇갈리는 시선은 이제 망설임이 없었다. 시라부가 조용히 입술을 축이고선 종이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고시키의 눈앞에 대고 흔들면서 시라부는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어떤 대답을 끝으로 고시키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시라부 앞으로 달려가 와락 껴안아버릴 뿐. 갑자기 숨이 턱 막히면서 당황한 시라부는 하지 말라는 듯 고시키의 등을 팡팡 두드렸지만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한숨을 내쉬며 그의 등을 어루만지기만 했다.

 

뭐, 그다지 최악은 아니었을지도.

 

곧 가로등 불이 깜박인다.

깜박, 깜박.

온 시야가 깜깜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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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mera Of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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