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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치

#시라부 시점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

 

 

 

5월 4일, 지긋지긋하던 짝사랑이 끝났다.

 

 

 

오이카와상이 나한테 고백해줬다. 다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정말 행복해서 눈물이 나왔다.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느냐는 둥, 왜 좋아하게 됐느냐 등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할 필요도 없었다. 단지 내가 좋아하는 오이카와상이 나를 좋아하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너무 벅차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말라버린 내 우물에 물이 다시 채워지기 시작했다. 오이카와상의 우물도 이젠 넘치지 않을 것이다. 최고의 생일이 아닐 수 없다. 파티나 친구들의 선물 같은 거 없어도 이미 충분하다. 오이카와상이면 과분하다.

 

 

 

***

 

 

“켄지로쨩, 뭐 먹을래?”

“글쎄요, 오이카와상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켄지로쨩이 먹고 싶은 거 먹을래”

 

“저희 이 대화 언제 하지 않았어요?”

“응? 그랬나?”

“네, 좀 예전에….”

“기억 안 나는걸”

“풉”

“으엑, 왜 웃어? 생각보다 내 기억력 나쁘지 않다고!”

“아뇨, 똑같은 말인데 느낌이 달라서요.”

단지 사귄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요.

***

 

 

확실히 사귀고 나서 달라진 것이 많긴 하다. 내가 이러면 싫어하면 어쩌지, 보단 내가 어떻게 하면 좋아해 줄까를 생각하게 됐달까, 오이카와상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그렇다. 다가가기도 쉬워지고, 먼저 하는 편은 아니다만 그래도 스킨십하기도 쉬워지고, 가끔 할 말이 없어져 침묵이 흘러도 초조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큰 변화이다. 그렇지만 사귀고 나서 변하지 않은 것도 많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호칭이다. 오이카와상은 사귀기 전부터 나를 이름으로 불렀고, 나는 성으로 불렀다. 그리고 사귀고 난 뒤도 그러고 있다. 그리고 내가 들키고 싶지 않아서 비밀 연애를 하느라 남들 눈을 조심할 수밖에 없다. 나도 오이카와상과 하고 싶은 건 무더기지만, 혹시 들킬까 무서워 다른 커플처럼 많은 걸 하는 편은 아니다. 스킨십도 단둘이 있지 않으면 못 하고 부끄러운 말들도 마찬가지다.

이렇든 저렇든, 오이카와상하고 연애는 행복하다.

 

 

 

 

***

 

 

 

손이 트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초가을인데. 물이 부족할 일도 없는데, 혹시 몰라 물을 더 마셨다. 그래도 손은 계속 텄다. 불안해 평소에 손도 안 댔던 핸드크림을 가져와 바르고 발랐더니 나아졌다. 손등이 따끔따끔했지만 무시하고 다시 연필을 잡았다. 오이카와상과 연애를 시작하면서 성적이 떨어졌다. 사실 오이카와상을 짝사랑했을 때부터 그러긴 했다만, 그땐 좀 의도적으로 오이카와상을 피해 다녔으니 적어도 시간은 있었는데, 지금은 감정은 같은데 시간마저 줄어드니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날이 많아졌다. 안 그래도 공부에 배구까지 하려니 더 빡빡하여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공부하고 있다. 아, 오이카와상 보고 싶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오이카와상이랑 어디 아무도 못 찾는 곳으로 도망가 버리고 싶다. 평생 같이 있고 싶다.

 

 

***

 

 

겨울이 되니 손이 더 트기 시작했다. 정말 1시간에 1번씩 핸드크림을 꼬박꼬박 발라줘야 할 정도로 손이 많이 텄다.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이번 가을부터 유독 심한 것 같다. 눈살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꺼내 오이카와상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오이카와상, 저예요. 오늘 시간 괜찮아요?”

“어...응, 돼. 왜? 만나게?”

“네, 재밌는 영화 개봉했다는데 보러 가요.”

“어..무슨 영화?”

“그-”

“아, 좋은 점심~”

“..네?”

“아, 미안, 여자애들이 왔어. 이따 전화할게.”

 

전화를 끄니 튼 손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짜증을 부리며 괜히 핸드폰을 침대에 던졌다. 아까 오이카와상은 나보다..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응, 켄지로쨩. 미안,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영화요”

“그래 보러 가자. 알아서 예약해줘. 끊을게”

“네, 이따-”

 

전화가 끊겼다.

 

 

핸드크림을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고는 오이카와상을 만나러 갔다.

 

“오이카와상!”

“어, 켄지로. 왔어?”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 딱히.”

“가요, 이 영화가 진짜 평이 좋더라고요.”

“그래?”

“네, TV에서도 많이 나올 텐데…. 한 번도 못 들어봤어요?”

 

 

“..오이카와상?”

“어? 응?”

“핸드폰만 보지 말고요, 네?”

“하아…. 응”

 

 

“..이 영화야?”

“네, 왜…. 요?”

“나 이거 봤어.”

“아 그래요? 어쩌지….”

“이거 스릴러잖아. 내 여자친구가 이거 볼 때-”

“네?”

“아, 미안. 내 말은 여자인 친구.”

“네….”

“무섭다고 손 떨어서 손잡고 봤는데 땀 장난 아니더라. 진짜 웃겼어.”

“아 그래요?”

“뭐야, 반응 왜 그래~”

 

그렇게까지 환하게 웃을 필요는 없잖아요.

 

“아녜요. 그래서 영화, 볼 거예요?”

“아니, 다른 거 보자.”

“뭐 보고 싶어요?”

“아 재밌어 보이는 게 없네. 그냥 보지 말자.”

“..그래요. 그럼 뭐 할래요?”

“그냥 집에 가자. 나 너무 피곤해.”

“..오이카와상이 피곤하다면 그러죠, 뭐….”

옛날이랑 같은데 느낌이 달라서요.

 

작별 인사를 한 손은 또 튼다.

 

 

 

 

***

 

 

 

 

 

 

또 한 계절이 가고, 계절이 온다.

손이 트는 건 계절과 상관없나 보다.

 

 

 

 

***

 

 

5월 4일, 지긋지긋하던 연애가 끝났다.

 

 

 

 

 

내가 말했다. 헤어지자고. 찬 쪽은 난데 눈물이 나왔다. 오이카와상은 덤덤했다. 그래, 그렇겠지. 이미 다 알고 있던 결과였다. 나도 알았고, 오이카와상도 다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상은 처음부터 날 좋아하지 않았다. 장난감 같은 거였다, 난. 심심해서 한 번 가지고 놀아보다 싫증 나면 쉽게 버릴 수 있는 그런 거였다, 난. 질문을 안 한 것도 사실 못 한 거였다. 무서웠다. 답변을 듣는다는 자체가 무서웠다. 다 가식일 것 같아서.

언제나 그랬었다. 내가 오이카와상에게 물을 줬다. 내 우물 따위 안 채워질 거,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상의 우물은 내가 있으니 항상 넘칠 것이다. 그래, 다 알고 있었다. 손이 트는 이유도 안다. 그 위를 덮고 또 덮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손은 계속 트고 메마른다. 다 알고 있었는데 거절하지 못했다. 내가 너무 멍청하고 한심해서, 오이카와상이 미워서 눈물이 나왔다. 나중에 오이카와상이 날 기억이나 할까, 너무 비참하다. 머리로도 알고, 몸으로도 겪고 또 겪는데 내성이 안 생긴다. 그때그때 감정이 다르다. 매일 매일 지친다.

결국, 연애를 하기 전에도, 할 때도, 한 후에도 힘든 건 나다.

 

 

최악의 생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 과분했었다.

그런데 난 왜 또 오이카와상이 보고 싶은지.

웃음이 나온다.

본 페이지는 편의상 존칭을 생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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