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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비 - 딸기 우유

작은 커피 우유를 건네 받았다.

 

“5월 4일날 뭐해?”

 

시라부 켄지로였다. 5월 4일이 무슨 날이더라.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건네 받은 커피 우유를 뜯었다. 아, 네 생일이구나. 고소한 커피향이 코를 찔렀다. 

 

“아무 것도.”

“그럼 올해도 나랑 만나자.”

“아직 한참 남았잖아.”

“미리 예약해두는 거지.”

 

나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혀를 축인 커피 우유가 몹시 달았다. 고등학생땐 꽤 쓰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은데. 커피가 쓸 나이는 지났음이 분명하였다.

 

시라부는 しろくも 브랜드의 분홍색 딸기 우유를 마셨다. 초등학생 때도 그랬고, 중학생 때도 그랬고, 고등학생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저 브랜드의 딸기 우유는 우리 부모님이 고교생이던 시절부터 판매 되었다고 그랬다. 그러니 혹시 모른다. 내가 시라부를 알기 이전에도. 그러니까 시라부가 유치원에 다녔던 시절에도, 시라부는 저 딸기 우유를 좋아하고 있었을 지도. 

 

“아 수업 가기 싫다.”

“웬일로.”

“세미상이 안 오니까.”

“아.”

 

이제와 털어놓는 이야기지만, 나는 어릴적부터 딸기 우유가 싫었다.

 

 

×

 

 

우리는 소꿉친구이다. 초등학교 1학년, 처음 학교라는 곳을 다니게 되었을 때부터 우리는 서로를 친구라고 일컬었다. 작은 킥보드나 네 발 자전거를 타던 시절 만났던 우리가, 이제는 준중형차를 모는 나이가 됐다하면 실감이 날까. 그만큼 우리는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단언할 수 있었다. 내가 아직까지 시라부의 첫사랑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시라부 또한 나의 첫사랑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연애를 지켜봐왔다.

 

허나 그것은 전부 어린날의 치기였다고,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연애라 부를 수 조차 없는 것들에 불과하였다. 시라부의 마지막 연애는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조심스레 애인이 생겼다 털어놓는 녀석을 보며 왜 그렇게 망설이냐 눈살을 찌푸렸더니, 만나는 사람이 우리반 반장이랬다. 어깨가 넓고 운동도 잘해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반장. 우리 학교는 남녀 분반이었고, 그것이 시라부의 첫 커밍아웃이었다. 

 

나는 그 날 하루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충격적이었던 건, 그의 커밍아웃이 아니었다. 내가 시라부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나의 정체성이었다. 헛웃음을 뱉었다. 그는 반장을 진심으로 좋아했고, 나는 지는 승부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일은. 멍청하게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는 이야기이다.

 

“한 달간 겪어본 대학 생활은 어때.”

“꼭 다른 학교 다니는 것처럼 말하네.”

“다른 과면 다른 학교나 같지, 뭐.

“글쎄. 그냥 고등학교 4학년 같다, 과제가 존나게 많다, 과 선배 한 명이 잘생겼다, 정도?”

“벌써냐.”

 

대학에 입학한 지 한 달, 그 때부터 시라부의 새 사랑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이리도 자세히 기억하냐 물어온다면, 일기장을 보니 잊을 수가 없더라고 대답하겠다. 내 일기 속 모든 문장의 주어는 시라부이다. 일기를 쓰는 날과 거르는 날조차도 시라부의 유무에 달려있었다. 그녀석과 만난 날엔 일기를 썼고, 만나지 못한 날엔 일기를 쓰지 않았다. 그것은 나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근데 진짜 잘 생겼다니까.”

“나보다?”

“누굴 누구랑 비교하냐. 너도 이름 들으면 알 걸.”

“오바.”

“진짜야. 네가 예쁘다 했던 너네 과 여자 선배가 번호 따는 것도 봤어.”

“이름이 뭔데?”

“왜. 찾아가서 그 선배 네 거라고 도장 찍어두게?”

 

시라부가 명치를 아프지 않게 쳤다. 나는 허리를 살짝 굽히며 ‘그런 거 아니야’라 얼버무린 것이 전부다. 예쁘다고 말했던 그 선배가 누구였더라?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시라부는 그것에 ‘아니긴.’ 짧은 말을 흘려보내며 휴대폰을 켜 그의 사진을 보였다.

 

“세미 에이타.”

“…음.”

“못 들어봤냐?”

“응.”

“대학 생활 허투루 했네.”

 

여럿이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이었음에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큰 눈매가 날카롭고, 머리가 뻗어있는 게 우리의 고교 시절 반장을 연상시켰다. 어깨가 넓고, 운동을 해온듯한 몸매. ‘이런 스타일 좋아하는 구나.’ 뱉어낼 수 없는 말을 꾸역꾸역 집어 삼켰다. 사진을 보이는네가 웃고있으니, 나는 또 한 번 바라보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

 

 

잠시인 줄 알았던 시라부의 관심은 우리가 2학년이 되던 해, 연심으로 성장하였다. ‘잘생겼다’ 말하던 그의 입버릇이 ‘좋아한다’로 변질된 것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시라부는 그와 퍽 잘지내는 듯 싶었다. 전공 수업을 같이 듣는 사이이니,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개라곤 하지 않겠다. 나는 시라부를 좋아하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그것은 노력에 그치고 만 다짐이었다. 이것 또한 예상치 못한 전개는 아니었다. 10여 년을 앓아왔는데, 단 10개월로 무마될 수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어느순간부터 바라보는 사람으로 정착하였다. 우리가 3학년이 되던 해에도 마찬가지였다. 

 

“생일날 가마쿠라 갈래?”

“내 생일? 네 생일?”

“네 생일.”

“5월 초에 바다를?”

“가지 말란 법은 없잖아.”

“그렇긴 하지.”

 

시라부는 매년 생일을 그, 세미 에이타와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정말로 바람에 불과한 것이어서, 우리는 매년 생일을 함께 보내는 사이가 됐다. 아주 특별한 걸 하진 않았지만, 아주 평범하게 보낸 적은 없었을 거다. 시라부는 늘 그렇게 바라면서도, ‘그럴리가 없겠지.’하며 나의 시간을 빌렸다.

 

“그렇지만 물에 들어갈 생각은 없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특별한 사이라고 안도하였다. 너의 15년을 알아온 걸로, 충분히 특별하다 믿고 싶었다.

 

 

×

 

 

“나 세미 선배랑 사겨.”

 

사레가 들렸다. 마시던 아메리카노를 내려두고 시라부를 바라보았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입 꼬리를 당겨 웃는 하얀 얼굴이 어쩐지 생기를 띠고 있더라니. 나는 또 못본 새 살이라도 찐 줄 알았다. 이녀석은 살이찌면 얼굴부터 붓는 편이니까. 나는 두 눈을 꾹 감았다떴다. 

 

“어떻게?”

 

벚꽃이 필 때가 되니 다들 연애를 시작하는가 보다. 나에게는 궁금하지 않은 것을 물어야 할 시간이었다. 놓여있는 아메리카노의 빨대를 어루만졌다. 시선을 마주하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부러 눈을 내리깐 채 색깔 없는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구부러뜨린빨대가 제 모습을 찾기도 전에, 시라부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술 마시고 고백했어.”

“네가?”

“응. 확실히 제 정신은 아니었지.”

“그렇네. 그사람은 뭐랬는데.”

“술김이냐고 묻더라.”

“그래서.”

“아니라고 했어.”

 

아, 그래. 무심한 말을 뱉었다. 시라부는 잠시 멋쩍은 듯 귀를 매만졌다. 녀석의 버릇이었다. 부끄러운 걸 부끄럽다 하지 못할 때, 녀석은 귀를 만지는 버릇이 있었다. 아마 나만이 알고 있는 버릇일 것이다. 나는 애꿎게 구부러진 빨대를 손에서 놨다. 착각일 지 모를 정적이 입술을 틀어막고 있는 듯 했다.

 

“그럼 이번 생일은 그 사람이랑 보낼 수 있겠네, 드디어.”

“응?”

“대학 온 뒤로 늘 바라던 거였잖아.”

“아, 그랬었지.”

“한 달도 안 남았는데. 그 전에 헤어질 건 아닐테고.”

 

시라부는 예전과 같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 봤다. 초등학생때부터 나보다 한참이 작아, 언제나 저 높이에서 그쳐있던 눈동자이다. 단 한 번도 나를 향한 적이 없었던, 머리색을 닮아있는 갈색 눈동자. 그 안에 비친 내가 애처로웠다. 초등학생 때도 그랬고, 중학생 때도 그랬고,고등학생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나는 깊은 숨을 조용히 뱉어내었다. 

 

“잘 됐네.”

 

가끔은 한결 같은 네가 미웠다. 

 

 

×

 

 

친구가 연애를 시작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달라지지는 않는다. 물론 나의 경우에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달라진 셈이었지만. 시라부는 여전히 나와 만났다. 서툰 운전을 핑계로 내 옆자리를 얻어 탔고, 혼자 있는 시간엔 여느때와 같이 나에게 전화를 했으며, 여전히 나를 ‘타이치’라고 불렀다. 시라부는 변한 것이 없어보였지만, 나는 집으로 돌아와 담배를 한 대 피고 잠드는 버릇이 생겼다. 시라부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이었다. 

 

[네 방에서 담배 쩐내 나.]

[방에서 피우니까.]

[인테리어는 너 같은데, 냄새는 너 아닌 거 같아.]

 

네게 익숙해진 나의 냄새가 뭐길래. 몇날며칠을 그 한마디로 앓았는지 너는 결코 모를 것이다. 버릇처럼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도, 네 한마디가 생각나 창문을 열었고, 평소 쓰던 향수를 방 안 곳곳에 뿌리기 시작한 것도, 너의 한마디를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필터 끝을 입에 물었다. 더 이상 우리 집엔 네가 찾아오지 않는다. 여전히 내 차를 타고, 여전히 나를 만났으며, 여전히 모든 것을 함께했지만, 너는 더 이상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 한 블럭을 더 걸으면 그 사람의 집이 있다며, 너는 몇 걸음을 멀리 걷기 시작하였다. 작은 변화였다. 아니, 작은줄로 알았던 커다란 변화였다.

 

나는 한참을 자고 일어나 냉장고 안 가득 담긴 딸기우유를 집었다. 학교와 가까워 네가 자주 드나들었던 이곳에, 발자국 마냥 남아있는 너의 흔적이다. 나는 입구를 뜯어 분홍색 액체를 입에 대었다. 혀가 얼얼해질 만큼 달아서 나도 몰래 미간을 잔뜩 구겼다. 

 

“이런 걸 왜 마시는 거야.”

 

한 팩을 전부 마시고 나면, 분명 머리가 지끈지끈거릴 것이다. 겨우 한 모금을 마신 그것을 미련 없이 싱크대에 흘려 보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취향은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내가 락을 들을 때 인디 음악을 들었던 너도, 내가 액션 영화를 볼 때 스릴러를 찾았던 너도, 내가커피를 마실 때 스무디를 마셨던 너도, 내가 너를 좋아할 때 딸기우유를 좋아했던 너도. 

 

나는 휴대폰을 열어 메신저 앱을 열었다. 별 말이 되지 않는 걸 별 말처럼 욱여 적고는 12시 시침에 맞춰 전송 버튼을 눌렀다.

 

[생일 축하해. 한 살 더 먹었으니까 이제 단것 좀 줄여라.]

[특히 딸기 우유.]

 

사라지지 않는 ‘1’에 허탈한 웃음이 샌다. 나의 시간을 빌렸던 너의 시간은, 그 사람 곁에서 멈추어있을 것이다. 나는 화면을 끄고 냉장고를 다시 열었다. 한 쪽에 놓여있던 커피 우유를 집을까 하다, 그 아래 놓여 있던 흰우유를 대신 집었다. 

 

“커피 우유를 좋아할 나이는 지났지.”

 

조만간 냉장고를 비워야겠단 생각을 했다. 

본 페이지는 편의상 존칭을 생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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